바람 바람 바람

잊혀진 약속

한해동안 2025. 3. 29. 22:49

오늘은 평소처럼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밥을 차리고, 아이들 옷을 챙기고, 아내에게 여행 얘기를 다시 꺼냈다. 아이 생일에 맞춰 바다 보러 가는 거, 우리가 몇 주 전부터 준비했던 계획이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슨 여행?”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분명히 이야기했고, 동의까지 받았던 일이다. 카카오톡도 보냈고, 그녀도 분명히 "응, 좋아"라고 했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열어 대화를 확인했다. 그 메시지를 그녀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녀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보았다.

“아… 그랬나?”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단순한 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감추고 있는 눈빛.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불안이 피어올랐다.

밤이 되어 아이들이 잠든 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몰랐던 거야?”

그녀는 내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잊고 싶었나 봐.”

하지만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요즘 자주 늦게 들어왔다.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자주 방 안에서 혼자 통화하거나 웃음을 참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나만 이상하게 느낀 건 아니었다.

그날 밤, 나는 그녀의 휴대폰을 보았다. 미안하다는 생각보다는, 진실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거기엔 내가 모르는 수많은 대화들이 있었다. 낯선 번호. 친밀한 말투. 그리고 결정적인 말.

“어제 너무 좋았어. 다음에도 우리만의 시간 만들자.”

손이 떨렸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나를 배신했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또 아무 일 없다는 듯 밥을 차리고, 아이들 학교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그 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다.

며칠을 견디며 지냈다. 그녀는 여전히 웃었고,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땐 완벽한 엄마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더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같은 마음을 나눌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나는 대화를 시도했다. “우리… 괜찮은 거 맞아?”

그녀는 말했다. “뭘 갑자기 그래.”

그 말에 나는 무너졌다. 갑자기? 이건 갑자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나는 우리를 지켜보며, 매일같이 기대하고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내 마음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읽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 같았다.

며칠 후, 나는 상간남의 이름을 알게 됐다. 그의 얼굴, 그와 나눈 메시지, 그녀가 보낸 사진들까지.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확인하고 있는 걸까.

증거가 필요한가? 내 마음이 이미 부서졌는데.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알고 있어. 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명도, 사과도 없었다. 눈을 피했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이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이상했다. 그녀에게 분노를 느끼는 동시에, 여전히 함께한 시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가 웃던 여행, 아이의 첫 생일, 밤늦게 서로의 어깨에 기대던 시간들. 그 기억들이 너무 따뜻해서, 지금의 차가운 진실과 이질적으로 부딪혔다.

나는 자책했다. 혹시 내가 먼저 그녀의 마음을 놓친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일에 치여, 그녀를 방치한 건 아닐까. 하지만 어떤 이유도, 이 배신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이제 나는 결심했다. 진실을 안 이상, 그 앞에서 외면하지 않기로. 상간남에게 법적 조치를 준비하고, 그녀에게도 분명한 책임을 묻기로 했다.

나는 아직 아빠이고, 나는 아직 가장이다. 나 하나 무너져선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오늘도 아이를 깨우며, 아침밥을 짓는다. 하지만 그 속의 나는, 이미 어제와 다르다.

그리고 이 일기를 쓰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처음으로 울었다. 말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내 다짐을, 조용히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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