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사람들
처음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다. 나를 탓했다.
당신이 그렇게 멀어졌을 때, 내가 뭘 놓쳤는지 헤아리며 밤마다 되뇌었다.
그래서 더 잘하려 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라도 더 다정하게.
당신이 피곤하다면 옆에 앉아 등을 두드렸고,
마음이 식은 건 아닐까 두려워, 일부러 더 웃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당신 마음은 이미 다른 남자에게 가 있었다는 걸.
“출장 다녀올게.”
“미안, 야근이라 좀 늦을 거야.”
그 말들이 반복될수록,
당신의 눈빛은 점점 나를 피해갔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당신의 차 블랙박스를 돌려봤다.
모텔 앞에서 차를 대고,
미소 지으며 내리던 당신.
낯선 남자와 함께 들어가는 뒷모습이
몇 초도 되지 않았지만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기에 충분했다.
그날 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숨이 막혔고,
심장이 무거워서 땅에 꺼질 것 같았다.
그저 아이 얼굴만 바라보며 참았다.
다음 날부터,
나는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다.
톡 캡처, 통화 기록, 카드 내역, 위치 공유, 블랙박스.
왜 그랬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분노보다 더 컸던 건,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는 절망감이었다.
“그 사람은 그냥… 잠깐 감정이 흔들렸던 거야.”
“너랑은 다른 결이 있었고, 지금은 끝났어.”
당신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끝난 게 아니라, 들킨 거라는 걸.
그리고 당신은 끝내
그 상간남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를 감쌌고,
나를 ‘의심 많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당신이 요즘 너무 예민해.”
“내가 무슨 죄인이야?”
그 순간 깨달았다.
당신은 죄책감 없이 외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게 당신의 본모습이었다는 걸.
나는 무너졌다.
밤마다 베개를 껴안고 울었다.
아이에게 들킬까 조심조심 소리 죽여 울었고,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오는 날도 많았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어느 날
울지 않게 되었다.
그건 회복이라기보단… 무감각이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거짓말에 반응하지 않았고,
당신의 눈물에 흔들리지 않았다.
“진심으로 미안해.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미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고 있었다.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며 생각을 정리했고,
숨이 가빠질수록 당신에 대한 감정이 멀어졌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지켜야 할 건
당신이 아니라
내 삶, 내 존엄, 내 아이였다는 걸.
그래서 더는 당신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질문도, 확인도, 감정 섞인 대화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당황했겠지.
그동안 내가 너무 조용해졌다고.
이전처럼 울지도, 화내지도 않으니
“혹시 날 용서한 걸까?” 하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그건 용서가 아니라,
결심이었다.
나는 상간남에게 내용증명을 보냈고,
당신에게 이혼 준비 사실을 알렸다.
처음으로 당신이 눈동자를 흔들며 말했다.
“우리 진짜… 이렇게 끝나는 거야?”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넌 이미 끝냈어. 나는 이제 정리할 뿐이야.”
당신은 울며 붙잡았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사랑은 노력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그건 기본적인 신뢰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신뢰가 깨졌다면
노력은 고통일 뿐이다.
당신은 그 경계를 무너뜨렸고,
나는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삶을 쌓기로 했다.
지금도 가끔 당신이 생각난다.
아이가 자는 얼굴을 보고 있을 때,
우연히 옛 사진을 정리할 때,
한참 웃으며 이야기하던 당신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그때의 당신이고,
지금의 당신은 내가 다시 마주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이제 당신 없이도 괜찮다.
당신이 사라진 자리에도
나는 내 감정과 삶을 채워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의 나는
당신이 다시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그게 내가 이 싸움에서 얻은 가장 값진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