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나는, 아버지이기에

한해동안 2025. 4. 5. 10:31

 

 

그녀가 바람을 피운다는 말은 처음엔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의심이라는 감정조차 사치일 정도로, 나는 너무도 그녀를 믿고 있었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믿음은 너무도 손쉽게 무너졌다. 그녀의 핸드폰, 지워진 대화 목록, 늘 핸드백 안에 넣고 다니던 그 잠금된 공간.

어느 날, 그 작은 틈이 열렸고 나는 마주했다. 그녀가 보낸, 그녀가 사랑을 속삭인 그 메시지들을. 그 수십 줄의 문자 속에서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었다. 내 아내가 아니었다.

“보고 싶어. 오늘 밤은 우리 둘이만 있고 싶어.”

메시지를 읽는 손이 떨렸다.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화면을 스크롤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대화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서로 익숙했고, 무방비였고, 오래된 듯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나를 넘어선 세계에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걸까? 그녀가 외로웠던 걸까? 아이들 키우고, 돈 벌고, 부모님 병원 모시고… 숨 돌릴 틈 없이 바빴던 지난 몇 년. 나는 언제부터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게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너지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내가 짓던 집이 하나둘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처가에 갔다.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그녀를 설득해줄 수 있을까 싶었다. 장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네가 남편 노릇 잘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다.” 순간 모든 핏줄이 거꾸로 솟았다. 이건 내 책임이 아닌데, 왜 나를 탓하는가. 장모는 더했다. “이성끼리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걸 이혼하겠다고 난리야?”

그때 나는 깨달았다. 여긴 내가 기댈 곳이 아니란 걸. 오히려 적이었다.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변호사를 통해서 얘기하겠습니다.” 그것이 내 마지막 말이었다.

변호사를 찾았다. 사실 그 사무실 문을 열기까지 수십 번 망설였다. 한때 사랑했고, 함께 살았고, 아이를 낳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더는 감정으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증거는 충분했다. 그녀의 메시지, 통화 내역, 동선, 차량 블랙박스. 모두 갖췄다. 감정은 무기처럼 차갑게 식혀야만 했다. 변호사는 “이혼 소송보다는 전략적으로 기각을 노리는 게 좋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확실하게 끝내고 싶습니다.”

그날 밤, 아이들 얼굴을 보며 나는 또 무너졌다. 무슨 죄가 있어서, 이 아이들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그녀는 웃으며 나에게 말했었다. “당신은 좋은 아빠야.” 그 말이 이제는 비수가 되어 꽂힌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 감정의 수렁에서 나와야 했다. 더는 무너질 수 없었다.

처음에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참고, 이해하고,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이 싸움을 감정이 아닌 현실로 끝낼 것이다. 그녀는 나를 떠났고, 나는 이제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미련도, 기대도, 애정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연락을 해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 나는 간단히 답했다. “법적으로 정리된 뒤에 보세요.” 감정을 자극하려는 전화를 몇 번 받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무표정하게, 냉정하게 대처했다. 그녀가 내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은 이제 후회뿐이어야 했다.

법정에 서는 날, 나는 단정한 셔츠를 입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너의 세상에서 나를 지워라. 그리고 나는 너 없이 더 잘 살겠다.”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실감한 건,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웃으며 뛰어노는 그날이었다. 처음으로, 내 웃음이 거짓이 아니었다. 아직은 슬픔도 있고, 분노도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살아간다. 감정이 아니라, 선택으로.

그리고 나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다짐한다.

“나는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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