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팔은 안으로 굽는다

한해동안 2025. 4. 5. 10:33

처음 알았을 때는 몸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그녀의 휴대폰에서 봤던 문장 몇 줄이,

내가 그동안 쌓아온 모든 믿음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의심하지 않았던 게 후회될 정도로,

너무나 교묘하고 너무나 익숙하게

그녀는 그 남자와의 관계를 일상 속에 숨겨왔다.

“밥은 먹었어?”,

“오늘 일찍 끝나면 우리 커피 마시자.”

그 문장은 나도 그녀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니까 더 분노가 치밀었다.

나를 향했던 말이,

다른 사람에게도 쉽게 건네졌다는 사실이.

그녀는 울었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한순간의 실수였어.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실수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의도와 반복으로 구성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외도였다.

솔직히 말해, 처음엔 소송을 생각했다.

그 남자를 상대로도, 그녀를 상대로도.

이제 와서 깨끗한 척 하지 말라고,

적어도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변호사를 만나고, 판례를 검색하고,

법률상 감정과 사실이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느끼고 나니

모든 게 허무했다.

그녀가 내 아내라는 이유로,

내가 상간 소송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처가는 그녀를 감쌌다.

“딸도 사람이야. 실수할 수 있지.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된다.”

그 말에, 나는 숨이 막혔다.

같은 상황이 며느리에게 벌어졌다면

그들은 그렇게 말했을까?

정답은,

아니라는 걸 안다.

시가는 ‘실수’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정 파괴범’이라 했겠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라고.

집안 망신이라고.

가차 없이 내쳤을 거다.

그 순간 알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사람은 자기 편을 감싸고,

피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도덕보다 편이 중요해진다.

나는 억울했고,

그 억울함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억울함조차 감정적으로 터뜨리면

내가 더 손해라는 걸 알게 됐다.

나는 감정을 눌렀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건 뭐지?”

“복수인가? 회복인가?”

“이 상황에서 내가 가장 손해 보지 않는 방법은 뭘까?”

나는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반복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물었다.

“이 결혼, 계속 유지하고 싶니?”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할 건데?”

“너는 네 행동에 대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야?”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에서 죄책감과 공포가 읽혔다.

그건 나를 향한 감정보다는,

자신의 실수가 가져온 결과에 대한 불안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깨달았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실수를 인정한다.

그건 용기라기보다,

자기 생존에 대한 계산이다.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고,

조용히 사과하고,

내가 나가 떨어지지 않도록 수위 조절을 한다.

그녀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해내고 있었다.

미안하다며 울고,

아이들 앞에서 더 헌신적으로 구는 그녀.

나는 그것이

진짜 반성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당장 내칠 수도 없었다.

현실이 있었다.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가족의 공동 재산과 시간,

그리고 내 인생의 절반이 그녀와 엮여 있었다.

나는 결심했다.

정의로운 선택이 아니라, 생존 가능한 선택을 하기로.

내가 감정적으로 무너지면

그녀는 나를 '감정 기복 있는 남자'로 몰아갈 것이다.

내가 이성적으로 대응하면

그녀는 최소한 조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 매일 관찰한다.

그녀의 말투,

동선,

감정의 흔들림.

그리고 철저하게 기록한다.

더는 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의심으로 방어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슬프지만,

그게 지금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

그 단어는 이제 낯설다.

하지만

책임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무겁다.

나는 오늘도

그녀와 살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따로 있다.

그 마음은 이제,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한 거리를 둔 채

나만의 전략을 세우며 살아간다.

그녀는 내게서 용서를 받지 못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도 용서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게 지금은

가장 중요한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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