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당신의 회복과 존엄

한해동안 2025. 4. 16. 08:03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녀는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눈물에 진심이 담겨 있었는지, 나는 끝까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확신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사과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린 뒤였다.

마치 불이 꺼지고 나서야 소화기를 찾는 사람처럼.

나는 그동안 얼마나 애써왔던가.

이 가정을 위해, 아이를 위해, 그녀를 위해.

퇴근 후에도 집안일을 나눠 하고.

평소엔 표현이 부족하다며 지적받았지만, 적어도 나는 배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상간남과 나눈 메시지, 서로를 부르던 다정한 호칭,

주말마다 내가 출근한 사이 함께했던 데이트 코스들.

모든 걸 알고 나서도 나는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다.

“당신은 나를 떠날 수 없어. 아이도 있잖아.”

그녀는 그렇게 나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말조차 자기중심적이었다.

정작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책임을 피하고 싶다는 느낌이었다.

사과는 반복됐다.

하지만 그 사과는 매번 익숙했다.

미안하다는 말에 감정은 있었지만, 행동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핸드폰을 뒤로 숨기고,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내가 바란 건 거창한 회복이 아니었다.

다만, 그 사람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내가 받은 상처를 인정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조차 해내지 못했다.

“너무 힘들었어. 그때 나도 외로웠단 말이야.”

나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외로워서 그랬다고? 그럼 나는 지금 이 외로움을 누구랑 나눠야 하지?”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상간남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배신당했고,

아이에게도 상처를 안겼고,

우리 가정은 금이 갔다.

그리고 더 이상, 그 금은 메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감정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녀와 마주할 때는 말하지 않기로.

대신 글로 쏟아냈다.

노트북을 켜고, 내가 느낀 상처를 조목조목 적어 내려갔다.

그녀가 어떤 말로 나를 무너뜨렸는지,

내가 얼마나 참으며 살아왔는지.

그렇게 적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왜 아팠는지,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조금씩 마주하게 됐다.

감정은 언제나 나를 흔들었다.

어떤 날은 그녀가 자고 있는 얼굴을 보며

왜 이렇게 됐을까,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곧이어 또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가 상간남과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

그 웃음이 진심이든 아니든,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녀의 세계에 없었다는 사실.

그 이후로는 변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감정에 기대지 않았다.

기대할 것도, 기대받을 것도 없었다.

경제권을 정리했고,

집 안의 물건들도 하나하나 내 중심으로 재배치했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늘렸고,

그녀 없이도 하루를 채우는 연습을 했다.

처음엔 두려웠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이혼’이라는 단어도 더 이상 공포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나를 회복하는 출구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요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안다.

내가 떠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자신이 더 이상

그 어떤 무기로도 나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아이에게 잘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저녁을 차리고,

따뜻한 말투를 흉내 내고,

사과와 후회의 말을 더 자주 꺼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모든 게 '두려움'에서 비롯됐다는 걸.

사랑해서가 아니라, 잃고 싶지 않아서.

미안해서가 아니라, 외로워질까 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나쁜 것도 아니란 걸 안다.

믿음을 줬던 사람이 그걸 부쉈을 때,

그 관계는 끝나야 한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나 자신에게 충실해졌다.

나는 나를 지키기로 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내 마음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사과든.

진심이 없다면 그건 단지 ‘연기’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그런 연극에

관객으로 앉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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