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오늘도 혼자 이겨냅니다.

한해동안 2025. 5. 1. 08:05

가장 먼저, 말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내가 가장 많이 웃었던 사람이었고,

내가 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날들,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

그게 바로 아내였다.

그래서, 가장 먼저 아내에게 기대고 싶었다.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던 사람인데도

차라리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을 만큼

그녀는 내 전부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등을 찔렀다.

그날 밤, 무심코 충전기 찾으려다 열었던 서랍 속

두 번째 휴대폰이 나를 부수었다.

그 안에는

익숙하지 않은, 그러나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주고받은 상간남과의 대화들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지쳤다’ 했지만,

그에겐 ‘보고 싶다’고 썼더라.

심장이 식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울지도 못했다.

그게 처음이었다.

내 삶의 구심점이

한순간에 부정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그녀는 당황했다.

“정말 미안해. 나도 나 자신이 이해가 안 돼.”

“그 사람은 그냥… 잠깐 흔들린 거야.”

하지만 나는 안다.

잠깐의 흔들림으로는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없다.

그녀는 감정을 가졌고,

그 감정이 나와의 삶보다 무게가 더 있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말을 아꼈다.

친구에게도, 부모에게도, 누구에게도.

내가 자꾸 “이해해달라”는 말로

내 상처를 풀기 시작하면

그 말이 누군가의 입을 타고 돌아다닐 거라는 걸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그럼에도 한 사람에게 말했다.

정말, 말하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밤이었다.

가장 오래된 친구.

군대도 같이 갔고,

내 결혼식에서 축사를 해줬던 그 친구.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들었다.

“너처럼 잘 살아보려 애쓴 놈이… 그건 좀 심했다.”

그날 나는 그 말을 위로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며칠 뒤,

다른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야… 너 괜찮냐?”

“그 일, 좀 충격이더라.”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게 꺼낸 내 진심이

이젠 이 동네 어디쯤을 떠돌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했고,

너무 허탈했다.

그녀의 외도보다

그걸 털어놓았던 사람에게서 들은 배신이

이상하게 더 뼈아팠다.

가슴이 진짜 텅 빈 기분이었다.

그 후로 나는 결정했다.

“이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그건 고립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누구도 나의 마음을

‘아, 그런 일이 있었대’라는 가벼운 대화 주제로 삼게 두지 않기 위해.

그녀는 집에 있다.

우리는 같이 살고 있지만,

같이 사는 부부는 아니다.

나는 말을 줄이고,

그녀는 눈치를 본다.

“당신, 나랑 다시 안 해볼 생각이야?”

그녀는 가끔 묻는다.

하지만 그건 반성의 언어가 아니라

‘내가 다시 받아줄지’를 떠보는 말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벌써 ‘용서받기 위한 시간’이라 착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어떤 감정도 복구되지 않았다.

내가 지금 고요한 건,

분노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다시 믿고, 다시 웃고,

다시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기엔

그녀의 부재가 너무 깊었다.

몸은 곁에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오랫동안 내 옆에 없었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알았다.

상간남에 대한 소장은 준비 중이다.

나는 그녀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감정적 대화로 흐를 것이고,

그건 내 싸움의 본질을 흐릴 테니까.

이건 싸움이 아니다.

회복이다.

내가 짓밟힌 감정에

법적 이름을 붙이고,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조용히 일기를 쓴다.

무너진 건, 내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다시는—

아무에게도 내 마음을 가볍게 건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 상처는

이제 내 안에서 조용히 말린다.

그걸 햇볕에 널어

누구나 들여다보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지킬 것이다.

나의 마음과

나의 선택과

나의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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