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을 쥔 손이 조금 떨렸다.
생각보다 가볍게, 생각보다 덤덤하게 서류를 넘겼고,
마지막 한 장이 테이블을 떠나면서 모든 게 끝났다.
그녀는 내 옆에 없었다.
이젠 당연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차창 밖을 바라봤다.
흐린 듯 맑은 하늘.
묘하게 마음속과 비슷한 날씨였다.
“그 여자,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건 달랐다.
“잘 살아라.”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처음 그녀의 외도를 알았을 땐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결혼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고,
함께 미래를 그렸고,
자식까지 있는 사이였는데.
그런데도 그녀는 상간남에게 웃고 있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의 손길에 기대며,
내게는 점점 말이 없어졌었다.
나중에서야 모든 게 연결됐다.
왜 나를 자꾸 피했는지,
왜 같이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는지,
왜 그녀의 표정이 멀어졌는지.
처음엔 분노였다.
숨이 막혔고,
밤마다 이를 갈았다.
보고도 믿기 힘든 메시지를,
둘만의 사진을,
그녀의 뒷모습을 수없이 곱씹으며,
왜 나였는지를 생각했다.
내가 부족했나?
내가 따뜻하지 않았나?
내가 남편으로, 아버지로 모자랐나?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건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녀가 외도를 한 건,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그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가정을 지킬 책임보다,
감정의 충동을 앞세운 건 그녀였다.
나는 끝까지 붙잡고 있었을 뿐이다.
며칠을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고,
감정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군대를 가기 전,
처음 사랑했던 아이와의 이별.
며칠을 앓고, 세상이 끝난 줄 알았던 그 시절.
그 아이의 얼굴도 이름도 이젠 흐릿하다.
그 기억마저도 따뜻하게 웃으며 떠올릴 수 있다.
“시간은 사람을 지우는 게 아니라, 덜어내주는 거구나.”
그때 처음 마음이 편안해졌다.
잊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게 해주는 것.
그게 시간의 힘이었다.
그날 이후, 난 운동을 시작했다.
평소 잘 신지 않던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피곤했고 지쳐 있었지만
그 안엔 이상하게도,
다시 살아보자는 눈빛이 있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아도,
내가 나를 붙잡아야 했다.
트레드밀 위를 걷다가 생각했다.
“내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외도는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건 그녀의 선택이었고, 그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나는 내 몫의 책임을 다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나를 더 이상 탓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복수하라고.
돈이라도 받아내라고.
그녀의 명예를 박살내라고.
그런 말도 물론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건 결국 나를 갉아먹을 뿐이라는 걸.
지나치게 분노하면,
나까지도 괴물이 된다.
그래서 다짐했다.
“나는 그냥 잘 살아버리겠다.”
재혼이 목적도,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음을 열 준비만 해두기로 했다.
어느 날, 편하게 웃는 내 옆에
자연스럽게 앉을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그때 가서 감사하면 되는 일이라고.
밤이 되면 문득 아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어느 날,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작고 맑은 눈망울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아빠, 오늘 뭐했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음… 아빠 오늘, 인생 다시 시작했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처음으로 내 마음이 가벼워졌다.
슬픔도, 분노도, 원망도
모두 그 작은 아이의 웃음 앞에서 녹아내렸다.
그날 밤, 나는 깊이 잠들었다.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오직 내가 나에게 말할 수 있었다.
“잘했어.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젠 후회도 없다.
그녀를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시간 대신
나를 살리고, 아이를 안아주는 시간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내 인생의 두 번째 챕터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내가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이미, 이겨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