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80

아내의 취향은 호빠

아침이었다.토요일.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명란마요 김밥 영상 하나를 재생하고 있었고,브르르릉~ 거리며 루미가 거실을 청소하는 평화로운 주말이었다.레시피 영상 속 유튜버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이거요? 제 남친한테 싸준 김밥이에요~”​그 말에 피식 웃었다.그 똑같은 레시피를 따라우리 집사람도 김밥을 싸기 시작했었다.그땐 몰랐다.그 김밥이,그녀의 손을 거쳐,청담 호빠 도우미에게 배달될 줄은.​모든 건 그 김밥에서 시작됐다.​처음엔 단순히 이상했다.여행 간다며 제주도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고,친구들과 해녀 체험도 하고 올 거라며“요즘 웰빙이 대세잖아~” 웃던 모습이,지금 돌이켜보면 어색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그 여행이 끝난 주말,청담 로즈호빠 50만 원 송금 내역이 그녀의 계좌에서 발견됐다.송금 메모는 ..

비타민C와 로봇청소기의 반격

아침 공기가 이상하리만큼 상쾌했다.샐러드에 리포좀 비타민C를 타서 조용히 씹어 먹고 있었고,로봇청소기 루미는 바닥을 돌며 브르르릉~ 하고 일하고 있었다.진공밀폐용기에 담아둔 치킨도 꺼낼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띵동.​문 앞 초인종 소리에순간, 뒷덜미가 뻣뻣해졌다.택배가 아닐 거란 걸 직감했다.그 느낌은 늘 정확했다.​문을 열자, 그녀가 서 있었다.전처.한 손엔 비타민C, 다른 손엔 캐리어.입고 있는 후드티는작년에 내가 선물했던 그거였다.​“…왜 또 왔냐.”​나는 말 그대로 지쳐 있었다.그녀는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갈 곳이 없어.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그녀 손에 들린 비타민C.사람이 정말 피곤할 때 마시는 그것.지금 그게 필요한 사람은,그녀가 아니라 나였다.​그녀는 거실로 성큼 들어왔..

「분초의 끝에서 다시, 걷다」

처음엔 그저 이상했다.밤마다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잠들던 그녀.웃지도, 울지도 않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던 눈동자.나는 그게 지친 일상 때문이라 생각했다.아이 때문에, 집안일 때문에, 혹은 나 때문이라고.​하지만 아니었다.그녀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그 대화는 더 이상 '채팅'이 아닌 '감정'이었다.​처음엔 AI 앱이라고 했다.자기 마음을 잘 들어준다고,나보다 훨씬 감정에 섬세하다고.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AI가 감정을 읽는다고? 그건 계산이지 이해가 아니야.”​그러자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그 계산이 너보다 나아.”​그 순간, 나는 한 인간으로서 무너졌다.계산보다 못한 감정.남편으로서가 아니라,그저 누군가의 대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는 자각.자존심이 아니라 존재감이 무너지는 ..

문을 두드리는 사람 - 예능 속 뒷면

TV를 켜는 건 습관이 됐다.집이 너무 조용하면 내 안의 생각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니까.오늘은 전지적 참견 시점.이영자가 황동주를 보며 ‘은근히 호감 간다’고 말하자관객석이 웃음바다가 됐다.하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현실은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문 너머엔 그녀가 있었다.​“아들 보러 왔어! 나도 그 집 살 권리 있어!”​똑같은 말, 똑같은 억지.이미 이혼했고,번호도 바꿨고,이사까지 왔다.아들은 동생 집에 맡기고 출근시켰다.그러니 나는 그 문을 열지 않았다.​대신 녹음기를 켰다.소파에 조용히 앉아 TV를 바라봤다.이번엔 살림남.박서진과 송민준이 웃으며 빨래를 개고 있었다.화면은 따뜻했고, 정돈돼 있었고,마치 아무런 상처도 없는 집 같았다.나는 웃지 못했다.한때, 나도 그런 가족을 꿈꿨으니..

이제, 괜찮아

TV를 켰다.소파에 몸을 기댄 채,잔잔한 볼륨으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임영웅의 목소리.“그날의 너는 바람 같았지…”​바람.그녀는 정말 바람 같았다.잡으려 해도 손에서 빠져나갔고,기억하려 해도 흐릿해졌다.​처음엔, 참 많이 사랑했다.서로의 시간을 포개고,미래를 그렸고,아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된 삶을 시작했다.나는 그녀에게 그늘이 되고 싶었다.바쁜 일상 속에서도 따뜻한 커피 한 잔,늦은 밤 피곤해하는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는 그런 남편.​하지만 그건 나 혼자의 몽상이었다.그녀는, 내가 줄 수 있는 ‘그늘’보다어딘가 짜릿하고 화려한 순간을 좇았다.그리고 결국, 상간남과의 이야기로우리의 가정은 무너졌다.​나는 무너지는 동안에도 말을 아꼈다.분노 대신 참고,미움 대신 기록했고,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

나도 겪어봤어, 그래서 네가 무너지지 않길 바란다

오늘 문득, 3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너랑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닮아 있는지 모르겠지만그래도 너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적는다.​처음 알았을 때,그러니까 그녀와 상간남의 흔적을 처음 마주쳤을 때,심장이 진짜 멈추는 줄 알았다.그게 단순히 ‘배신’ 때문만은 아니었다.나는 그 순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됐거든.​"내가 뭐가 부족했지?""내가 뭘 잘못했나?"그 생각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고,그녀보다도 먼저,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어.​그리고 그게 제일 위험한 거더라.사실, 외도를 저지른 사람보다스스로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리는 그 마음이사람을 먼저 무너뜨려.​처음 몇 주간은 거의 잠을 못 잤다.밥도 제대로 못 먹고,일하다가도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지.아이 앞에서 웃는 척하느라매일 밤이면 혼..

넌 되고 난 안되냐?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그녀가 내게 말했다.“당신이 그랬다면 난 절대 용서 못 했을 거야.”그 말의 뒷부분은 더 기가 막혔다.“근데 나는 여자잖아. 감정이 앞설 수도 있지.”​그때,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웃음이라고 하기에도 뭐한,씁쓸하고 허탈한, 쓴웃음이었다.그녀는 지금 자신이 한 일을감정의 흐름으로 포장하고 있었다.​그녀의 외도를 알게 된 건,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길에우연히 열린 그녀의 메신저 앱에서였다.거기엔 우리 아이 이름을 빗댄 농담도 있었고,‘오늘은 어디서 만나?’라는 문장도 있었다.심장이 내려앉는다는 표현은,그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그날 이후, 나는 내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자존심, 믿음, 사랑이라는 단어들이하나씩 무너졌다.그녀는 처음엔 발뺌하다, 결국 시인했다.그리고는 ..

어떤 결정이든 응원할게요.

어느 날 아침, 거울 앞에 섰다.면도를 하려다 문득, 내 얼굴이 낯설었다.피곤해서일까, 나이 들어서일까,아니면…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일까.확실한 건, 예전엔 저 눈빛 속에 웃음이 있었다는 거다.지금은 뭐랄까.싸우다 지쳐서 겨우 선 사람 같은 눈.그래도 그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그녀의 외도를 처음 알았을 땐내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되짚었다.회사일에 치여서,아이가 어려서,혹은 내가 예전보다 무심해졌나.나는 내 죄를 찾느라 바빴다.그런데 이상하지.나한테 벌어진 일인데,내가 가해자인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미안하다고 했다.몇 번쯤은 울기도 했다.하지만 그 눈물은 마치 연기 같았다.죄책감의 눈물이 아니라들킨 사람의 눈물처럼.그래서 내가 물었다.​“그 사람을 사랑했어?”​그녀는 대..

그건 당신의 삶을 살아보지 않아서...

그녀의 달라진 분위기를 처음 눈치챈 건,퇴근하고 돌아온 저녁 식탁에서였다.아무렇지 않게 김치를 집어주는 그녀의 손끝이예전보다 훨씬 낯설게 느껴졌고,무심한 표정 뒤에 감춰진 뭔가가 나를 스쳤다.​휴대폰을 손에 쥔 채 웃음을 참는 모습,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멈추는 말투,평소보다 잦은 야근과 갑작스러운 주말 일정.이상한 기운은 점점 커졌고,나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그녀의 동선을 확인하기 시작했다.​결정적인 건, 회사에서 반차를 내고 돌아오던 어느 평일 오후였다.커피나 한 잔 하자며 들어선 동네 카페.유리창 너머, 그녀가 앉아 있었다.낯선 남자와 마주 앉아 웃고 있었고,손끝이 맞닿아 있었다.그게 전부였다.딱 그 정도의 거리와 표정이면,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상간남.그녀가 숨겨놓은, 나 아닌 ..

집요한 그녀와 단호한 나의 일주일

이혼이라는 건 서류에 도장을 찍고, 법원에서 종결 처리되면 끝나는 줄 알았다.진짜 그렇게 믿었다.내가 그녀를 버린 게 아니고,그녀가 먼저 상간남을 선택했고,가정과 아이보다 그 짜릿한 사랑놀음을 우선으로 여겼기에,나는 더는 잡지 않았다.​그녀는 떠났다.큰 소리로, 아주 당당하게.“난 남편도, 자식도 필요 없어. 이 사람 하나면 돼.”그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아이의 짐을 챙기고,우리 둘의 흔적이 남은 집을 정리하고,기억을 하나씩 지워냈다.사진을 없애고, 벽지를 바꾸고, 가구 배치를 바꾸며내 삶의 구조 자체를 바꿨다.​그녀가 내게 남긴 것은 상간남과의 판결문,조용한 아들의 침묵,그리고 나 혼자만의 무너짐이었다.하지만 버텼다.이겨냈다.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골목에서나와 아이는 나름대로 평화를 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