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넌 되고 난 안되냐?

한해동안 2025. 5. 11. 01:14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당신이 그랬다면 난 절대 용서 못 했을 거야.”

그 말의 뒷부분은 더 기가 막혔다.

“근데 나는 여자잖아. 감정이 앞설 수도 있지.”

그때,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씁쓸하고 허탈한, 쓴웃음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한 일을

감정의 흐름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외도를 알게 된 건,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길에

우연히 열린 그녀의 메신저 앱에서였다.

거기엔 우리 아이 이름을 빗댄 농담도 있었고,

‘오늘은 어디서 만나?’라는 문장도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표현은,

그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자존심, 믿음, 사랑이라는 단어들이

하나씩 무너졌다.

그녀는 처음엔 발뺌하다, 결국 시인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근데 넌 나한테 관심 없었잖아.”

“나는 늘 혼자였어.”

“그 사람은 내 말에 귀 기울여줬어.”

나는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 죄를 찾아내려 애썼고,

나는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는지

하루 종일 머릿속을 파헤쳤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외롭게 하지 않았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일했고,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려 했고,

그녀가 울면 같이 울었고,

그녀가 아프면 병가를 내고 병원에 데려갔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외면, 외도,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이중 잣대였다.

“나는 여자니까.”

“감정적인 거잖아.”

그녀는 상식이 아닌 것을

정상이라 우기고 있었다.

그 말들 앞에서

나는 내가 미친 건가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혼 이야기가 오가던 와중,

그녀는 돈 이야기를 꺼냈다.

양육비는 못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미 많이 상처 받았으니까,

당신이 책임지는 게 맞지 않겠어?”

그때 나는 더는 말을 잃었다.

이건 협박에 가까웠다.

그녀는 끝까지 ‘피해자’로 남으려 했다.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키우는 건 나였다.

밤마다 열 나는 아이를 돌본 것도,

학부모 상담을 다닌 것도,

혼자 김밥 싸서 도시락통을 채운 것도.

그녀는 그 모든 시간에 없었다.

그저 멀리서 메시지 한 줄로

‘미안’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드물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였다.

그래서 버텼다.

참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웬만하면 아들만큼은 나처럼 살게 안 하려고.”

그 말은 내 모든 선택의 중심이었다.

어릴 때 받은 상처,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삼킨 감정들,

그래도 부모 노릇은 제대로 하고 싶었던 내 간절함.

그걸 물려주지 않기 위해

나는 수없이 감싸고, 참았다.

하지만 결국 돌아온 건

무책임과 외면, 그리고 뒤틀린 정의였다.

그녀는 자신은 안 되고,

나는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네가 날 정말 사랑했으면,

한 번쯤은 참아줬어야지.”

그 말에 나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럼 너도 날 사랑했으면,

한 번쯤은 안 그랬어야지.”

이후로 나는 법적 거리두기를 시작했다.

변호사를 통했고,

양육권을 확보했고,

접근금지까지 신청했다.

그녀는 종종 메시지를 보낸다.

‘아이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말조차

진심보단 자기감정의 위안이라는 걸.

나는 지금 내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아닌 나.

상처를 준 쪽이 아니라,

이겨낸 쪽으로.

아직도 불쑥불쑥 무너지는 밤이 있다.

아이의 얼굴에서 그녀의 눈을 볼 때면

잠시 울컥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다시 다짐한다.

“나는 버티고 있다.

그리고, 잘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그 증거다.

이젠 말할 수 있다.

그때 내가 바보였던 게 아니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끝까지 남았던 거라고.

이제는 그 사랑을

나 자신에게 돌릴 시간이다.

내 아들에게 당당한 아빠로,

그리고 언젠가 나 자신에게도 떳떳한 사람으로

나는 오늘도 다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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