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달라진 분위기를 처음 눈치챈 건,
퇴근하고 돌아온 저녁 식탁에서였다.
아무렇지 않게 김치를 집어주는 그녀의 손끝이
예전보다 훨씬 낯설게 느껴졌고,
무심한 표정 뒤에 감춰진 뭔가가 나를 스쳤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웃음을 참는 모습,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멈추는 말투,
평소보다 잦은 야근과 갑작스러운 주말 일정.
이상한 기운은 점점 커졌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선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건, 회사에서 반차를 내고 돌아오던 어느 평일 오후였다.
커피나 한 잔 하자며 들어선 동네 카페.
유리창 너머, 그녀가 앉아 있었다.
낯선 남자와 마주 앉아 웃고 있었고,
손끝이 맞닿아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딱 그 정도의 거리와 표정이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간남.
그녀가 숨겨놓은, 나 아닌 누군가.
나는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다.
손이 떨려 초점이 흔들렸지만,
내 기억 속엔 선명했다.
그 남자의 옷, 얼굴, 웃음,
그리고 그 앞에서 무장 해제된 그녀.
그날 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아이 숙제를 봐줬고,
나는 식탁에 앉아 묵묵히 밥을 먹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조용해졌다.
말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아무런 변명도, 고백도 하지 않았다.
그게 우리였다.
서로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며 살아가는 부부.
이혼은 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이 때문이다.
중학교 마지막 학년,
민감한 시기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이 집에서 아직은 부모로,
가족으로 남아 있는 게 맞다고 믿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늦게 들어왔고,
나는 묻지 않았다.
자기 전에 아이 방에 들러 이불을 덮어주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게 내 밤이었다.
분노도 슬픔도 다 지나가고,
이젠 아무 감정도 남지 않은 밤.
가끔 그녀가 자리에 없는 동안,
나는 아이와 평범한 하루를 보낸다.
아침에 밥을 차려주고,
학교 가기 전 가방을 챙겨주고,
다녀온 아이에게 물 한 컵 건네며 하루를 듣는다.
아이는 모른다.
아마 느끼고는 있겠지만,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저 넘어갈 수 있는 일들.
나는 그 ‘느낌’을 ‘기억’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더 조심하고,
더 많이 들어주고,
더 오래 옆에 앉아 있으려 한다.
그녀는 언젠가 떠날 것이다.
그 남자와 이어질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엔 짐을 싸고 나갈 거란 걸 나는 안다.
아이의 졸업식이 끝난 날일지도 모르고,
다음 명절이 지난 후일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면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관계의 끝.
이 결혼의 마지막 문장.
하지만 그 전까지는
아이의 기억 속에서
나는 여전히 아빠로 남아야 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곁을 지켜준 사람.
상처는 있다.
그걸 감춘다고 없는 게 되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걸 들이밀지 않기로 했다.
그게 내 선택이다.
이혼은 행동이고,
지키는 건 감정이다.
나는 오늘도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알고 있다.
그녀가 다녀간 시간,
그녀가 남긴 말,
그리고 내가 지우지 않고 남겨둔 증거들.
때가 되면,
내가 해야 할 선택은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아이의 기억 속
좋은 아빠로 남기 위해
오늘 하루를 또 살아낸다.
#아내외도
#상간남
#사실혼부부
#아이를위한선택
#외도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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