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잘 살아보자

한해동안 2025. 5. 7. 07:04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되었을 때, 머릿속이 하얘졌다는 말이 진짜구나 싶었다.

나는 그날, 퇴근 후 평소처럼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아이와 나눈 짧은 대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휴대폰 화면에 잠깐 떠올랐던,

익숙하지 않은 이름 하나.

그게 시작이었다.

처음엔 의심이었다.

설마.

우리 사이에 설마 그런 일이 생길까 싶었다.

내가 매일 아침에 일어나 그녀의 커피잔을 챙기고,

잠들기 전에 아이 이불을 덮으며 서로를 챙긴 이 평범한 일상 안에

타인이 스며들 수 있을까.

하지만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고,

확신은 분노가 되었다.

그녀는 처음엔 부인했다.

“그냥 연락만 했어.”

“업무적인 관계였어.”

“나도 나를 모르겠어.”

나도 그랬다.

나조차도, 나 자신을 모르겠더라.

내가 이렇게 작아질 수 있구나.

이렇게까지 초라해질 수 있구나.

거울 속의 나는 낯설었다.

감정은 억제되지 않았고,

식욕은 사라졌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내 눈치를 봤고,

나는 말없이 그녀를 지켜봤다.

대화는 단어를 잃었고,

우리 사이엔 얇은 투명막이 하나 쳐진 듯했다.

그 너머로는 서로가 보이지만, 닿지 않는 거리.

그 거리를 나는 매일 가늠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계속 이 상태로 버틸 수 있을까.

하루는 내가 퇴근하자마자 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다 정리했어.”

정리.

그 단어가 왜 그렇게 공허하게 들렸는지.

그녀의 말엔 죄책감이 없었다.

있었다면,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그림자처럼.

대신 그녀는 피곤해 보였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피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 후로, 난 점점 감정을 줄였다.

아니, 줄인 척했는지도 모른다.

아이와 놀고, 출근하고, 집에 돌아오고,

그 안에 감정을 최소화하며 하루를 버텼다.

그녀와의 관계는 극도로 형식적이 되었다.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예의,

아이 앞에서 어른답게 보이기 위한 노력,

그 모든 것이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어느 날 밤, 거실 소파에서 뒤척이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푹 내뱉는 그 소리.

그 안에 담긴 불안, 초조, 죄책감,

그리고 아마도 후회.

나는 조용히 방에서 그녀가 예전에 먹던 신경안정제 약병을 꺼냈다.

손에 올려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 네가 먹던 거. 도움 될지도 몰라.”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 먹어.”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분명 써 있었다.

‘이제 정말 내가 돌아버릴 것 같다.’

나는 그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이불을 깊숙이 뒤집어쓰고 잠들었고,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서로의 고통을 꺼내 말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날 이후로 다시 평소처럼 굴기 시작했다.

아이를 챙기고, 출근하고, 식탁을 정리하고.

표면은 고요했지만, 물밑은 여전히 출렁였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그 고요함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내 안의 분노를 조금씩 꺼내 정리할 수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불안을 감추며 하루를 버텼다.

내가 처음 그녀의 외도를 알게 된 순간으로부터

정확히 다섯 달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무너졌고,

무너진 채로 가만히 있었고,

조금씩 다시 일어섰다.

이젠 그녀가 다시 상간남과 연락하는지 추궁하지 않는다.

그런 일을 또 반복할 사람이면,

나는 이번엔 더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켜보기로 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어떤 사람인지

그녀도 알아야 하니까.

나는 내 삶을 정리하고 있다.

감정의 쓰레기들을 치우고,

불필요한 증오를 접어두고,

나와 아이에게 필요한 것만을 남기는 중이다.

사랑이 끝났는지,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더 이상 그 사랑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언젠가 그녀가

내 앞에서 다시 말할 수도 있다.

“정말 미안해.”

그때 나는

그 말에 기대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말을 기다리며 살아온 게 아니라,

그 말 없이도

살아갈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매일 아침

내 자신에게 인사한다.

“오늘도 잘 버텼어. 그리고, 잘 살아보자.”

그 한 문장으로

나는 다시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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