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후회는 결국 남는 사람의 몫이다

한해동안 2025. 5. 4. 06:02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이렇게 따뜻할 수 있구나, 처음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

매일같이 서로의 하루를 나누고, 눈을 마주치면 웃음부터 터지던 시간들.

그 시절엔 우리가 헤어질 거라곤,

이토록 낯선 감정으로 끝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결혼을 하고, 삶의 무게를 함께 견디며 버텼다.

사는 게 쉽지 않았고, 각자의 역할 속에서 지쳐갔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녀가 웃으면 피곤함도 잊었고,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면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나는 몰랐다.

아니, 모르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자꾸 다른 공간에 마음을 뒀다.

같은 집에 있어도, 말은 줄었고, 눈빛은 피했다.

“요즘 피곤해”라는 말로 잠을 피하고,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나는 묻지 않았다.

믿고 싶었으니까.

내가 믿는 그 사람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진실은 스스로 찾아왔다.

그녀의 외도.

그리고 상간남.

심지어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무너졌다.

그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세계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엔 인정할 수 없었다.

정말 네가 그랬다는 거야?

내가 함께 살고, 사랑했던 그 사람이?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반복했다.

하지만 모든 건 사실이었다.

그녀가 나 몰래 나눴던 대화,

숨기려다 흘린 흔적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침묵이 말해줬다.

나는 분노보다 상실감이 컸다.

배신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녀를 믿었던 나는,

그만큼 크게 부서졌다.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무슨 말도, 무슨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건 이렇게 무력하구나.

그걸 처음 알았다.

그녀가 돌아오길 바랐던 건 아니다.

다만,

왜였는지를 묻고 싶었다.

무엇이 그렇게 부족했는지,

내가 왜 아닌 사람이 되어야 했는지를.

그녀는 사과했다.

“미안해.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나는 웃었다.

그 말은 회피였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그 한 마디에 다 덮어버리려는 말.

그 후로, 나는 내 시간을 살기로 했다.

다시 나를 위해 살아보기로.

누굴 미워하는 데 인생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 시간에 대한 모독이었다.

헬스장에 등록하고, 매일 30분이라도 걷기 시작했다.

내 감정을 글로 쓰고,

하루를 정리하며 나를 다독였다.

힘들 때면 거울을 보며 말했다.

“넌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그녀는 떠났다.

물리적으론 같은 공간에 있어도,

이미 떠나버린 마음이었다.

나는 끝까지 책임을 다했고,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그러니 미련은 없었다.

그녀가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건 이제 내 몫이 아니다.

후회는 끝까지 남지 않은 사람의 몫이다.

나는 끝까지 남아 있었고,

포기하지 않았고,

진심이었다.

사랑은 오래한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얼마나 진심이었는가,

얼마나 도망치지 않았는가.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게 내가 스스로에게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자부심이다.

이제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산다.

그 웃음 하나가,

내 하루를 견디게 만든다.

나는 아이에게 당당한 아빠이고 싶다.

누구를 원망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어른으로 기억되고 싶다.

“아빠는 후회 안 해.

왜냐면 정말 열심히 사랑했으니까.”

언젠가 아이가 물어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빠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조금은 더 단단한 내가 남을 거란 걸.

그때 나는,

누군가의 선택이 아닌

내 선택으로 웃을 수 있을 거란 걸.

728x90
반응형

'바람 바람 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겠다  (0) 2025.05.06
기.운.내.  (0) 2025.05.05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3) 2025.05.02
오늘도 혼자 이겨냅니다.  (0) 2025.05.01
고등어백반이 되어버린 내 상처  (1) 202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