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녀의 외도를 알게 된 순간부터, 내 안에 있던 모든 단어들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화를 낼 수도 없었고, 울 수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 채,
화면 속 메시지 몇 줄에 전부를 잃은 기분이었다.
처음엔 부정하고 싶었다.
아닐 거야, 아닐 수밖에 없어.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함께 나눈 시간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하지만 증거는 너무 명확했고,
무엇보다 그녀의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미안해.”
그녀는 짧게 말했다.
하지만 그 ‘미안’이라는 말 안엔
아무 책임도, 아무 후회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건 그냥 상황을 피하려는 한숨 같은 말이었다.
처음엔 그녀를 원망했다.
상간남을 증오했다.
둘 다 나에게서 모든 걸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다.
내가 쌓아올린 신뢰,
아이를 위한 꿈,
평범한 하루,
모두 그들의 선택으로 박살이 났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나를 너무 오래 방치했다는 걸.
외도로 인해 무너진 건 사실이지만,
그 이전부터 나는 내 감정을 외면하고 살았다.
그녀가 멀어지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저 피곤하겠거니,
잠깐이겠거니,
스스로를 속이며 버텼다.
그리고 그 모든 침묵이
결국 이렇게 돌아온 거였다.
한참을 무너졌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출근해서 멍하니 책상만 바라보다가 퇴근했다.
하루하루가 버티는 일상이었고,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아빠 오늘 기분 좋아?”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날 따라 더 우울했다.
아이의 얼굴이, 그녀의 웃음과 겹쳐 보였다.
그 순간 너무 미안해서,
정말 눈물이 났다.
“내가 이렇게 망가져 있으면 안 되겠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복수도, 원망도,
그 어떤 것도 아이 앞에선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아빠였고,
아직도 한 사람의 삶을 책임져야 할 존재였다.
그래서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나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차가운 물에 얼굴을 씻고,
하루에 한 문장씩 일기를 썼다.
그 안에는 슬픔도 있었고,
후회도 있었고,
무기력도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으려는 발버둥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처럼 힘들어하는 사람의 글을 읽고 있었다.
그 사람도 나처럼 아내의 외도를 겪었고,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났다고 했다.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결국, 스스로를 구하는 건 자기 자신이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마음속 깊이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바람에 실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떠났고,
내 삶에서의 자리를 스스로 지우기로 선택했다.
상간남?
그도 내 감정의 대상에서 이제는 지워졌다.
이제 나는 나를 중심에 두기로 했다.
좋은 음식을 먹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대화하고,
내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기운 내세요.”
요즘 나는 그런 말을 자주 한다.
내가 했던 경험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건 내가 아팠던 시간도 헛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니까.
“지금 상황을 인정하는 게 먼저예요.”
“그리고 이제는,
남이 아닌 당신 자신을 위해 살아주세요.”
그 말을 할 때면,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무너져서 아무 말도 못 하던 그 날들,
그 날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조금은 안도하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
어쩌면 평생 그날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무너지지 않는다.
내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내 존재를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또 하루를 보낸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언젠가 완전히 웃을 수 있을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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