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방을 처음 봤을 땐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았다.
디자인도 괜찮았고, 그녀가 그토록 아끼는 모습에 오히려 흐뭇했다.
“내가 열심히 벌어서 산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나는 ‘그래, 고생했으니 저 정도는 충분히 누려도 되지’ 생각했다.
아내가 자기 자신을 위해 소비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싶었다.
그게 ‘존중’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며칠 전, 그 가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로고, 독특한 컬러, 딱히 대단한 건 아닌데도 왜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겼을까.
그녀는 그 가방을 들고 외출을 자주 하진 않았다.
오히려 신주단지 모시듯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어 닦곤 했다.
그 당시엔 단지 아끼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보인다.
그 가방, 상간남이 사준 거였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가 “내가 벌어서 샀다”고 말하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웃음, 그 자랑, 그 말투.
모든 게 날 속이는 연극이었다.
“그걸 자랑스럽게 내 앞에서 들었단 말이지?”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그날 밤, 나는 거실에 홀로 앉아 가방을 바라봤다.
가방 하나가 이렇게 불쾌한 물건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무언가를 태워 없애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불태운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 가방은 그냥 시작일 뿐이니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녀가 최근에 입기 시작한 옷,
갑자기 바뀐 취향,
어느 날 툭 던졌던 화장품 브랜드 이야기.
그 모든 것에 상간남이 뒤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흔적이 우리 집 구석구석에 있는 걸까.”
그녀는 당연하게 내 옆에 앉고,
당연하게 내 앞에 밥을 놓으며,
당연하게 “힘들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당연함들이 다 거짓에서 비롯된 거라면?
무너졌다.
기억까지 더럽혀지는 기분.
우리가 함께 웃었던 순간들조차도 조롱처럼 느껴졌다.
가장 무서운 건,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중생활’을 해왔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심지어 숨결까지.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쯤 되면, 신뢰라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그녀는 변명했다.
“그때는 내가 많이 흔들렸어.”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건 상간남이 가방을 사줄 만큼의 관계였던 거잖아.”
“그건 이미 마음이 거기 있었단 거잖아.”
그녀는 울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눈물조차 믿을 수 없었다.
상대방이 진심으로 후회하더라도,
그 후회가 더는 내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방을 바라보다가
나는 조용히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쓰레기통 앞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버리지 않았다.
이건 증거였다.
내가 겪은 모욕과 배신의 기록.
그저 없애기엔 너무 무거운 상징이었다.
이후, 나는 차분히 정리를 시작했다.
그녀가 말한 것들을 다시 하나하나 확인하고,
계좌 내역, 카드 기록, 통화 목록까지 들여다봤다.
“혹시 또 다른 물건이 있진 않을까.”
“또 다른 흔적이 남아 있진 않을까.”
집안 구석구석이 미로처럼 느껴졌다.
그 안에서 나는,
잃어버린 시간과 감정의 조각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거울을 마주했다.
내 눈에 생기가 없었다.
사람이 감정에 갉아먹히면 이런 얼굴이 되는구나 싶었다.
분노는 너무 자주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의심은 내 몸을 숙이게 했다.
그녀가 나를 다시 잡으려는 듯 노력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신뢰는
누군가의 노력만으로는 회복되지 않는다.
무너진 건 구조물이지, 표면이 아니다.
나는 매일 마음을 다잡는다.
“다시는 흔들리지 말자.”
“변명에 마음 기울이지 말자.”
“기억하자, 그 모욕을.”
그녀가 내 앞에서 웃더라도,
나는 아직 웃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녀가 다시 내 손을 잡으려 하더라도,
나는 그 손이 어떤 손이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상처를 지우기보다
그 상처 위에 새로운 결정을 새기고 있다.
그녀의 말이 아닌,
내가 느끼는 감정과 판단으로
앞으로의 삶을 설계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모든 것을 정리할 날이 온다면
나는 그 가방을 가장 먼저 치워버릴 것이다.
그 물건은 나에게 잊혀지지 않을 하나의 문장이니까.
“이 사람은 내 신뢰를 이렇게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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