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애지중지하던 양산의 진실

한해동안 2025. 4. 4. 16:37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햇볕이 유난히 따가웠던 여름날이었다.

아내는 어김없이 양산을 들고 나섰다.

며칠 전부터였다.

그 전까진 아무 양산이나 대충 쓰던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꼭 그 양산만 고집했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게 뭐 대수라고”

하지만 자꾸만 그게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나의 시선을 느낀 듯

“그냥… 이게 좋아서”라며 웃었다.

그 말엔 설명이 없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사람이 변하는 건 한순간이다.

하지만 변했다는 걸 알아채는 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나는 눈앞의 그녀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계속해서

이상한 감정이 자라났다.

그녀는 평소보다 꾸미는 날이 많아졌고,

향수를 바꿨고,

외출이 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자책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자꾸만 질문이 떠올랐다.

“이 사람, 지금 나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게 맞나?”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욕실에 있던 그녀 대신, 나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실수인 듯, 대화창을 열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한 줄이

모든 걸 설명해주었다.

“그 양산 잘 쓰고 있어? 너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 선물이었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나는 화면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던 양산,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이유.

그 모든 게 상간남의 선물이었다.

생각보다 충격은 조용히 왔다.

비명도 없었고, 눈물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지며

나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갔다.

그녀가 나오는 소리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녀가 들고 있는 양산이

더 이상 햇볕을 가리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건, 그녀의 이중성과

내가 몰랐던 삶의 흔적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가 무엇을 입는지,

누구에게 문자를 보내는지,

집을 나설 때의 발걸음이 어떤지.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의 스위치를 하나하나 건드렸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속였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속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양산 하나로 시작된 이 진실의 조각은

그동안 내가 외면하고 있던 수많은 정황들과 연결되었다.

그녀가 자주 외출하던 시간,

갑자기 바뀐 말투,

자꾸만 피하던 눈빛.

그리고 그동안 내가 받아온

이유 없는 거리감.

나는 이제,

그녀를 믿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에게 다시 기대고 싶지 않다.

그녀는 평소처럼 행동한다.

아이를 챙기고,

밥을 차리고,

내게 평소와 같은 말을 건넨다.

하지만 나는,

그 말들 속에 감춰진 또 다른 대화를 떠올린다.

그녀가 그 남자에게 했던 말들,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들.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나는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준 단편적인 일상에

속아 있었던 거라고.

상간남이 누구인지,

어떤 방식으로 만났는지,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건

그녀가 내게 등을 돌렸고,

나는 더 이상 그 등에 손을 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나를 지킬 차례라고.

더 이상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고.

그녀의 거짓은 더 이상 내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들고 다니는 양산처럼,

그녀의 마음도 이미 다른 사람에게 건네졌고

나는 단지

그 그림자 아래에서 조용히 무너졌을 뿐이다.

하지만 이젠,

그늘에서 나오기로 했다.

햇살이 따가워도

그늘이 거짓이라면

차라리 타는 편이 낫다는 걸

나는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나를 잃지 않겠다.

그리고 다시는

누구의 선물 하나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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