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잊혀지지 않는 사람

한해동안 2025. 4. 4. 16:41

나는 오늘도 혼자 집에 들어섰다.

불 꺼진 거실은 여전히 그날처럼 적막했고, 현관 옆에는 그녀의 슬리퍼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도, 여행지에서 사 온 자잘한 기념품들도 제자리에 있는데, 정작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사라졌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그 사람만 없다.

그게 더 잔인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지…”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땐, 믿기지 않았다.

그녀와 상간남의 대화를 확인했을 때, 머릿속이 하얘졌다.

처음엔 장난이겠거니 했다.

그러다 문장 하나,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심장이 멈췄다.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과 너무 다른, 너무 익숙한 사랑 표현이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왜 나였을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분노가 먼저 밀려왔다.

그녀를 향한 분노보다 나 자신을 향한 자책이 컸다.

내가 너무 방심했던 건가.

너무 믿었던 건가.

아니면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걸까.

며칠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회사에서도 머리가 돌지 않았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뭔가를 놓친 게 있었나, 되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을 했다.

그녀는 그런 내게 등을 돌린 거다.

아무 이유 없이, 혹은 내가 모르는 수천 가지 이유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랑 진심이었어?”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아끼는 그 표정이 더 무서웠다.

“말을 못 한다는 건… 인정하는 거잖아.”

한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세상이 흐려졌고, 소리도 빛도 감정도 모두 둔해졌다.

사람들은 나를 위로했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했지만,

나는 알았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 아픔도 있다는 걸.

하루는 문득, 거울 속 내 얼굴을 마주했다.

피곤하고 지쳐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또렷했다.

그때 깨달았다.

“이러고만 있을 순 없다. 이건 내 인생인데.”

그래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진들을 치우고, 그녀의 흔적을 하나씩 없앴다.

방 안 곳곳에 남아 있던 머리핀, 치약 짜는 방식, 늘 향이 남던 수건까지.

쉽지 않았지만 버텼다.

물건보다 더 힘든 건, 내 안에 자리한 그녀의 기억이었다.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공원을 돌았고, 땀이 흐를수록 머릿속도 조금씩 비워졌다.

처음엔 고통을 잊기 위해 뛰었지만, 나중엔 나를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몸이 움직이자 마음도 조금씩 움직였다.

책도 읽기 시작했다.

예전엔 그녀와 함께 보던 드라마가 전부였지만,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을 채워갔다.

처음엔 허전했지만, 그 속에서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 엇나갔는지도, 왜 더는 참으면 안 되는지도.

내가 나를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구나 싶었다.

아이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그녀와의 관계는 끝났지만, 부모로서의 책임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아이 앞에서는 흔들리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아이 앞에서 당당한 아빠가 되자.”

가끔 그녀가 연락을 해온다.

“잘 지내?”라는 말로 시작되는 문자.

이제는 심장이 요동치지 않는다.

차분하게, 짧게 대답한다.

“응, 잘 지내.”

나는 용서한 게 아니다.

다만 더는 그 일에 나를 소모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그녀가 나에게 어떤 짓을 했든, 나는 나를 지켜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를 위해 하루를 산다.

지금도 가끔은 문득문득 생각난다.

함께 웃던 장면들, 익숙했던 그녀의 뒷모습.

하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한다.

“지금 네 옆에 있는 사람은 네가 지켜야 할 너 자신이야.”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상처는 있지만 부서지진 않았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은 길고 멀지만

나는 천천히, 그러나 단단히 걸어갈 것이다.

더 이상 외롭지 않은 내가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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