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한해동안 2025. 4. 5. 10:35

서류를 꺼냈다.

도장도, 봉투도, 준비되어 있었다.

서류 한 장, 봉투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고

누군가의 가면을 찢어내고

또 누군가의 위선을 증명하게 될 거란 걸 알면서도

손끝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이게 진짜 끝을 내는 길인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나는 지금 복수를 하는 건가.

아니면, 정의를 세우는 건가.

그조차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모든 증거는 이미 손에 있었다.

판결문, 진술서, 녹취, 문자 캡처, GPS 로그.

상간남과 아내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는지

하나하나 기록된 증거들이

마치 법의 언어로 내 분노를 통역하고 있었다.

상간남은 나와 같은 회사 사람이다.

직급도 꽤 높고, 사내 평판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겉으로는 책임감 있고, 집안 좋고, 애들 좋아하고,

그런 사람으로 비춰졌겠지.

“그렇게 잘난 사람이 남의 아내를 탐했나.”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아내의 표정, 말투, 핸드폰을 보는 습관,

어디서부터 이상했는지

지금은 다 기억난다.

그리고 오늘,

나는 드디어 결정을 내려야 했다.

회사 인사과, 감사실, 윤리위원회.

여기서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 처리하면

그 남자는 징계를 받을 것이고

아내는 더는 숨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이게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전에 한번, 직접 마주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상간남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그가 전화를 받았다.

“나야. 얘기 좀 하자.”

처음엔 침묵.

그리고 당황한 듯한 숨소리.

“회사에서 보는 것보다, 조용히 얘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는 결국 약속을 잡았다.

내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걸

대충 감지했겠지.

커피숍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손에 든 서류를 다시 꺼내 보았다.

도망칠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무언의 압박이자, 내 결심의 증표.

그는 마침내 도착했다.

예전처럼 당당하지 않았다.

어깨는 움츠러들었고, 눈은 흔들렸다.

나는 말없이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건 소장이다. 정식으로 접수되기 전에 널 한번 부른 거야.”

그는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했겠지만,

임신 사실, 연락 내용, 사진까지 다 있어.

다 모았고, 다 확인했고, 다 입증 가능해.”

그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변명할 거 있어?”

“…그냥, 감정이었다고 말해도 믿지 않겠지?”

웃음이 났다.

“감정이면 다 되는 거였나.

그 감정 하나로 내 결혼, 내 시간, 내 신뢰, 내 자존감은 다 무너졌어.”

그는 입을 닫았다.

나는 조용히 봉투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이건 내 마지막 기회였다.

너한테 말 걸 기회,

눈 마주칠 기회,

사람 대 사람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법이 하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 남자가 나와 마주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혹은 이미, 두 사람은 모든 걸 알고 대응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녀는 한 번도 내게 명확하게 사과하지 않았다.

눈물을 보인 적은 있었지만

그건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들켰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침실 문을 지나 거실에 섰을 때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 싸워야지.”

사랑은 끝났고, 믿음은 무너졌고,

이제 남은 건 나 자신뿐이었다.

소송을 통해 그들이 잃게 될 것들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그것이 사람이라면 느껴야 할 최소한의 감정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알아버렸다.

그 감정들이

이들의 행동 앞에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내일 아침, 법원에 제출할 것이다.

상대는 그게 접수된 줄도 모르는 사이에

커피를 마시고, 웃고, 살아가겠지.

하지만 나는 그걸 알리고,

그걸 기록하고,

그걸 증명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모든 일들이 끝났을 때

나는 조용히 이렇게 쓸 것이다.

“나는 끝까지 나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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