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무너진 믿음과 새 출발

한해동안 2025. 3. 26. 18:20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집안 분위기가 이상해서 무심코 확인한 휴대폰.

낯선 번호, 익숙한 표현, 그리고 상간남과의 사진 한 장.

나는 얼어붙었다. 이건… 내가 알던 아내가 아니다.

아니, 내가 모르던 얼굴이 이제야 드러난 것뿐인지도 모른다.

혼란과 부정 사이에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설마 했던 짐작이 맞아떨어질 때,

나는 두 다리로 서 있는데도 바닥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나를 속일 줄은 몰랐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고, 그런 가정을 만들지 않았다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배신은 언제나 가까운 사람에게서 시작된다는 말이

그제야 실감났다.

“도대체 왜 그랬어?”

처음 꺼낸 말은 비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어떤 감정보다도 먼저 나온 건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서로에게 인생을 걸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그녀에겐 무거웠던 걸까.

나는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그보다 먼저 따져야 할 건

그녀가 나를 속이고,

상간남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어떤 변명으로도 덮을 수 없는 진실이었다.

감정은 분노로 바뀌었고,

분노는 결국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터져 나왔다.

“니가 내가 벌어다 준 돈으로 그 남자랑 먹고 놀았던 거냐?”

이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나 자신도 싫었다.

하지만 그 순간엔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걸 주고도, 모든 걸 잃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죄책감인지, 아니면 단지 들켰다는 당황스러움인지 모를 표정.

내게 남은 감정은 냉소였다.

그래, 이제 끝이다.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며칠 뒤부터 그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저녁을 차려놓고,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걸고,

심지어 내 옷을 개어두기까지 했다.

익숙한 행동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건 회복의 시작이 아니라,

지키고 싶은 현실을 잃기 싫은 사람의 연극 같았다.

“잘할게. 우리 다시 생각해볼 수 없을까?”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정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변화가 진심이 아닌 ‘공포’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가정을 막기 위한 '동작',

무너지는 생활을 붙들기 위한 '쇼'.

아이들을 볼 때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아이들이 뭘 안다고.

이게 누구의 잘못이라고.

그녀는 여전히 아이들을 데리고 장을 보고,

학교 행사에 참석하고,

자신의 ‘엄마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하지만 남편에게 저지른 배신은,

그 역할조차 위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어느 날 장모님이 다녀갔다.

아이들 학용품, 새 옷, 음식까지 한가득 들고.

나는 조용히 돈을 송금했고,

짧게 문자를 남겼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됩니다.”

그 문자를 보낼 때,

나는 마치 빚을 갚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만든 파국을

내가 묵묵히 치우고 있다는 자괴감.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 내가

어쩌면 더 바보 같았다.

나는 거실에 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그녀는 방 안에서 조용히 있었다.

예전 같으면 다가와 말을 걸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기분을 풀려고 했을 그녀였는데,

지금은 그 모든 게 사라졌다.

우린 한집에 살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타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노력’이 더 이상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상간남과 웃으며 시간을 보내던 그 순간부터

나는 부서졌고,

그 부서진 조각은 다시 붙일 수 없었다.

믿음이 없는 결혼 생활은

껍데기뿐인 무대다.

나는 더 이상 배우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관객이 아니었고,

우린 끝이 분명한 이야기를

억지로 이어붙이고 있었던 거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변호사에게 다시 상담 예약을 넣었다.

이번엔 정말 끝내려고.

미련이 남지 않도록,

그리고 이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아이들만 생각했다.

그 아이들만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건강하지 않으면

아이들에게도 건강한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걸.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결혼은 끝내야 했다.

나는 아내를 사랑했었다.

정말로.

하지만 이제 그 사랑은

그녀가 깨어버렸다.

그 잔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뿐이다.

다시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겠다.

그 대신

다시는 나를 잃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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