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휘어졌지만, 나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어

한해동안 2025. 6. 27. 02:16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익숙한 두드림. 일정한 간격.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가 또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김없이 이 집을 찾아온다.

잠깐 머물던 연고지조차 버리고,

도박 빚에, 외도, 상간남과의 잠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향한 손찌검까지.

그 모든 일이 있은 뒤에도

그녀는 말한다.

"아들 보고 싶어."

"이 집, 내가 살아도 되잖아?"

"그때는 내가 좀 힘들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문을 잠근다.

녹음기를 켠다.

그녀의 목소리를, 억지 울음을,

이제는 내 감정이 아니라 ‘기록’으로 받아들인다.

과거의 나는, 문을 열었을 것이다.

그녀의 말 한마디,

울컥한 표정,

"미안해"라는 두 음절에

내 마음을 건네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감정으로 흔들리는 대신,

침묵으로 결심을 다진다.

아들은 내 동생 집에 있다.

그날, 그녀가 또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아들을 안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다.

이제는 그 아이도,

그녀의 그림자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아빠, 엄마 또 올까?"

"엄마 소리 지르면 난 숨을래."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무너지는 감정을 꾹꾹 눌러

녹음기처럼 묵묵해졌다.

이제 나는,

아들의 공포를 대신 살아가는 사람이다.

며칠 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1박 2일’이라는 예능을 보게 되었다.

화면 속엔 뉴진스라는 아이돌이 나와 있었다.

진흙 속을 구르며 웃고,

계란을 깨며 친구 얼굴을 장난스럽게 때리고,

그러고도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 아이들의 웃음을 보며

나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와 함께 웃던 시간들.

평범한 일상이 전부였던 시절.

하지만 지금은 그 평범이 너무 멀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그 장면이 위로가 됐다.

“휘어지는 건 괜찮다.

부러지지만 않으면 된다.”

그 말이 내게 속삭였다.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

"휘어졌지만, 나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어."

그녀는 또 왔다.

이번엔 짐을 들고.

아예 이 집에 눌러앉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경찰에 연락했다.

접근금지 신청을 위한 증거가 충분히 모였다.

나는 조용히 준비했고,

그 준비는 이제 실행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당황했다.

"당신, 진심이야?"

"아이에게 엄마를 못 보게 하겠다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이에게 엄마가 아니라 상처였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 거야."

그 말은,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오랫동안 죄책감 속에 살았다.

"내가 뭘 더 잘했어야 했을까?"

"내가 덜 무뚝뚝했다면?"

그런 후회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나의 부족함이 아니라

그녀의 선택이었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는 텅 빈 집에서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고,

햇볕 드는 창가에 앉아

한 문장씩 일기를 쓴다.

"나는 오늘도 부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를 시작한다.

요즘은 작은 루틴을 만든다.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나가고,

새로운 동네 카페를 찾아간다.

책을 읽고,

아들과 함께 요리를 하고,

늦은 밤에는 오늘 하루의 마음을 노트에 적는다.

그녀의 외도는 내 인생의 실패가 아니다.

상간남과의 잠적은

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자기 자신을 책임지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매일

조금씩 나를 되찾아간다.

이제, 그 문은 닫혔다.

그녀가 다시 두드린다 해도

나는 열지 않는다.

내 마음은,

이제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열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러지지 않고

휘어져 있는 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내가, 나를 지켜냈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스스로에게 말한다.

“부러지지 마세요.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에요.”

#외도소송

#상간자대응

#가정파탄

#자기회복

#부러지지않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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