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단순한 오해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표정이 이상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이유 없는 짜증이 늘었다.
말을 걸면 대답이 느렸고,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요즘 피곤해서 그래. 회사 일도 많고.”
그 말을 믿었다.
믿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의 속옷 서랍을 정리하다 낯선 것을 발견했다.
내가 준 적 없는 향수.
태그가 붙은 채 숨겨진 쇼핑백.
그 안에서 나는 상간남의 흔적을 처음 마주했다.
몸이 굳었다.
뇌가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쇼핑백을 도로 접어 그녀의 서랍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평소처럼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웃는 얼굴 뒤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 너무 잘 보였기 때문이다.
“당신, 요즘 왜 그래? 표정이 왜 그래?”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을
그녀 입으로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나는 진실을 확인했다.
지인의 말이었다.
“네 아내, 임신했대. 그런데… 애 아빠가 너는 아니래.”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세상이 꺼지는 기분이 이런 걸까.
속이 뒤틀리고, 입술이 바짝 마르고,
숨을 쉬고 있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더라.
나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확인하고 싶었다.
그 모든 말들이 거짓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차트는 사실이었다.
“몇 주차이십니다. 안정기 들어서셨고요.”
무너졌다.
그녀는 말없이 나를 외면했고,
나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가슴 속에서 고요하게 폭발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건 배신이었다.
그 어떤 말로도 덮을 수 없는,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종류의 배신.
그날 밤, 나는 혼자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속에 온갖 장면이 떠올랐다.
함께 웃었던 순간들,
딸아이의 이름을 함께 고민하던 날,
기념일마다 그녀가 만들어주던 케이크.
그 모든 장면이 거짓 같았다.
“그럼… 그때부터였던 거야?”
“그 미소도, 그 손길도, 전부 연기였던 거야?”
나는 다음 날, 변호사를 찾아갔다.
상간소송을 준비하기로 했다.
어떻게든 이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법이 내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가 그것뿐이라는 사실이 슬펐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장을 접수하고, 법적 절차를 밟아갔다.
그녀와 상간남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집 주소는 형식상 그녀 부모님 댁으로 옮겨졌고,
상간남은 아예 잠적해버렸다.
도망치는 자들.
그들의 침묵은 고요했지만, 나에겐 살을 도려내는 칼 같았다.
나는 그들의 무대응 속에서 더 큰 분노를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도 뻔뻔할 수 있을까.”
“이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짓이야.”
나는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변호사와 함께 모든 증거를 정리했고,
그녀가 병원에 다녔던 모든 기록과
상간남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정황들을 묶었다.
그 와중에도 감정은 나를 배신했다.
밤에 혼자 있을 때면,
그녀와 나란히 누워 잠들던 기억이 떠올랐다.
“왜 그랬어… 왜 나였어야 했어…”
어쩌면 아직도 그녀의 진심을 듣고 싶은 내 마음이 남아 있는 걸까.
정말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그 끝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를 갈아먹는 감정들이 있었다.
불신, 경멸, 자괴감.
내가 놓았던 믿음이 부서져 깃털처럼 날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나는 더는 누구도 믿지 않기로 했다.
그녀를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책임지기로 했다.
“나는 싸우겠다.”
“이건 단지 위자료 몇 푼을 위한 소송이 아니다.”
“이건, 나를 버린 사람들에게 내가 잊힌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싸움이다.”
어느 날, 혼자 커피를 마시며 벽에 붙은 달력을 봤다.
변론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 메모장에 짧게 적었다.
> "이제 나의 마지막 감정 정리를 시작한다.
그 끝에는 미련도, 용서도 없다.
다만… 나 자신을 지키는 단단한 벽만이 남아있기를."
그때 처음으로, 울지 않았다.
그녀를 향한 감정이
드디어 고요하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나’가 걸어 나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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