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랑은 더 이상 못 살 것 같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렇지 않게 던졌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누군가 나를 쥐고 흔드는 것 같았고,
숨이 막혀왔다.
무슨 말인지 묻지도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싸늘했고,
어느 순간부터 나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처음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찾으려 했다.
일에만 집중해서?
육아에 더 적극적이지 못해서?
그녀가 원했던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해서?
수없이 나를 의심하고, 되돌아보고, 후회했다.
하지만 결국 알게 됐다.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그 사람은 상간남이었다.
확증을 갖기까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감은 이미 와 있었고,
증거는 얼마든지 있었다.
퇴근 시간과 달라진 루틴,
주말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
그녀의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걸,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정서를 나누고 있다는 걸
모르는 척하기엔 너무 많은 신호들이 있었다.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아빠, 엄마 오늘도 그 아저씨랑 전화하던데?”
그 순간, 피가 식었다.
이제는 내 아이의 눈앞에서까지 숨기지 못하는구나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남자 누구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없다니까.”
그러면서도 눈을 피했다.
그녀의 거짓말은 그제야 나를 죽이는 칼이 되었다.
처음엔 애원도 했다.
“우리 다시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아이 때문에라도, 한 번만…”
하지만 그 말이 나올수록
나는 점점 더 바닥으로 끌려 내려갔다.
나는 어느새 내가 누구였는지도 모르겠더라.
사랑받지 못하는 남편,
필요 없는 아빠,
그녀의 선택에서 제외된 남자.
살이 빠지고, 밤에 자다 자주 깼다.
냉장고를 열어도 먹을 게 없었고,
거울을 보며 "이게 진짜 나인가" 싶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먹기.
자기.
움직이기.
기록하기.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아닌 말들.
“오늘 아내는 나를 피했다.”
“오늘 나는 아이와 함께 컵라면을 먹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쓰다 보면 마음이 조금씩 정리됐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찾던 시기에서
내가 지금 뭘 원하는지를 바라보게 된 거다.
“나는 계속 참고 살고 싶은가?”
“내가 견디는 게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나는 누구를 위한 인생을 살고 있었나?”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나를 지키겠다고.
그녀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이미 그 남자와 감정을 주고받았다는 것,
내가 아무리 붙잡아도
그녀는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
그건 내가 만든 잘못도, 내가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선택했고,
나는 결과를 감당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미안해. 그냥… 나도 헷갈렸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미안해’라는 말로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았으니까.
나는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묻지 않았다.
그냥 서류를 넘겼다.
이제는 그저 기록과 절차가 남은 싸움이었다.
가끔 밤에 생각난다.
함께 갔던 카페,
우리 아이 첫돌날 웃으며 찍은 사진,
그녀가 좋아하던 음악을 함께 들었던 차 안.
그 기억은 모두,
이젠 나만의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떠났고,
나는 남았지만,
내가 진짜 버려야 할 건
그녀가 아니라,
내 안에 남은 '그녀와의 환상'이었다.
그녀는 내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사람이 없는 삶을 살기로 했다.
오늘도 아이와 공원에 다녀왔다.
조금 쌀쌀했지만,
햇살은 따뜻했다.
아이의 손을 잡으며
문득 생각했다.
“이게 나를 지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
기억은 지워지지 않겠지만
그 기억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않게 하겠다.
나를 위한 삶.
아이를 위한 삶.
그 무엇보다 ‘내 존엄을 지키는 삶.’
그녀가 사라진 자리,
나는 다시 나를 채워갈 것이다.
“오늘도 잘 버텼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이 하루를 마무리한다.
'바람 바람 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넌 잘하고 있어. 다시는 속지 마 (0) | 2025.04.14 |
---|---|
당신의 분노, 슬픔, 역겨움까지 (1) | 2025.04.13 |
한 걸음 쉬어가도 괜찮습니다 (5) | 2025.04.11 |
이제, 당신의 마음이 회복될 차례입니다 (0) | 2025.04.10 |
당신이 원했던 이혼, 이제는 내가 원합니다. (0) | 2025.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