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건 오랜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라는 얼굴’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말은 했지만 눈은 피하고, 고개는 숙이지만 입꼬리는 떨지 않는 사람. 나는 그 낯선 표정을 마주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야 너의 진짜 얼굴을 보는구나."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처음엔 단지 피곤하다고만 했다. 회사일이 많다고,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늦는다고, 회식이 많아졌다고. 나는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여자니까, 내가 사랑했던 여자니까.
그러다 어느 날, 아이의 사진을 함께 보며 웃던 그녀의 눈빛이 공허하다는 걸 느꼈다. 대화 중에도 자꾸만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던 그녀. 새로 바뀐 향수, 늘어나던 야근, 감정 없는 대답들. 모든 것이 다 말해주고 있었지만, 나는 그조차도 외면했다.
"설마, 아닐 거야.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
그러던 어느 밤, 우연히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노트북이 켜진 채 있었다. 손이 먼저 갔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그녀와 상간남이 주고받은 대화를 보았다. ‘다녀왔어’라는 말 대신 ‘오늘도 행복했어’라는 말. ‘보고 싶다’라는 말에 이어진 하트 이모티콘. 더는 피할 수 없었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분노보다 먼저 밀려온 건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몰랐다는 게, 내가 믿었다는 게, 이토록 수치스러울 수 있구나.’
그녀는 처음엔 발뺌했다. "그냥 문자야, 감정은 없었어."
그러다 증거를 내밀자, 오히려 화를 냈다. "왜 내 사생활을 몰래 봐? 그건 프라이버시야!"
그때 깨달았다. 이 사람은 이제 나를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구나. 내 감정은, 내 상처는,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그 후 나는 침묵을 택했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고, 울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그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 했다. 아이 앞에서는 웃었다. 그래야 내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거울 속에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잘 버티고 있네. 너, 진짜 대단하다."
아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초조해졌다. 상간남이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다. 가족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꿈꾸려 했던 그녀는, 결국 도망치듯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다고 해서 모든 게 되돌아가는 건 아니다. 껍데기는 같이 살아도, 안에서는 이미 끝나버렸으니까.
그녀는 말했다. "나… 미안해. 다시 잘해보면 안 될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이제는 내가 선택하는 자리였다.
"네가 떠나겠다고 했을 땐 그렇게 당당하더니, 이젠 왜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는 거야?"
상간남은 예상보다 유치하고 비겁한 사람이었다. 관계가 끝난 뒤에도 그녀에게 연락을 끊지 않았고, 오히려 아내 몰래 녹음해두었던 대화를 들고 협박 비슷한 말까지 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나는 법률 자문을 받았고, 관련된 자료를 하나하나 정리했다. 상간남은 끝내 위자료를 물었다. 돈보다도, 그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내는 말했다.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야.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늦었어. 그 말은, 그때 했어야 했어."
나는 지금 가계부를 다시 쓰고 있다. 정리되지 않던 삶을 하나하나 정리해나가는 기분이다. 카드값, 월세, 교육비. 그 안에는 그녀가 쏟아부었던 소비의 흔적도 함께 있다. 명품 쇼핑, 원인 모를 앱 결제들, 뒷면에 남겨진 상간남과의 공유 계정들. 처음엔 그 내역이 날 더 무너뜨릴까 두려웠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 모든 건 내 판단을 맑게 해주는 기록일 뿐이다.
어느 날 아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웃었다.
"다시 시작하긴 할 거야. 근데, 너랑은 아닐 수도 있어."
그 말은 협박이 아니다. 단정도 아니다. 그건 그냥, 내가 나를 위해 내린 선언이다.
"이제는 내가 중심이야. 더는 남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넌 잘하고 있어. 다시는 속지 마."
어쩌면 이 말이야말로, 내가 내게 해줘야 할 유일한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흔들리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진짜로 다시 시작할 그날을 위해, 나는 나를 단단히 세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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