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이제는 미안하단 말도, 당신의 눈빛도 나한텐 의미가 없어요.

한해동안 2025. 4. 15. 03:48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녀가 처음 무릎을 꿇던 날,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고, 분노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저, 속이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날따라 그녀의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아니, 그 전에 이미 나는 그 눈빛이 변해버렸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내 눈을 피하던 시선,

뭔가를 숨기듯 핸드폰을 감추던 손길,

평소엔 귀찮아하던 화장을 갑자기 다시 시작한 그 무심한 습관들.

“그 사람은 그냥, 나한테 따뜻했어…”

그녀가 처음 상간남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선택한 말의 어휘조차 끔찍했다.

‘따뜻했어’라는 그 한 마디는

우리 사이엔 더 이상 온기가 남지 않았다는 고백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 무너져갔다.

출근길에는 정신없이 스스로를 밀어넣었고,

퇴근길에는 일부러 집 앞을 빙 돌아 시간을 끌었다.

집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 하나, 말투 하나가 내 속을 뒤흔드는 칼날이 되었으니까.

나는 질문했다.

“왜?”

“왜 그렇게까지 했어? 우리 가정은 뭐였는데?”

하지만 그녀는 늘 말을 흐렸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래, 모른다. 나도, 당신도, 그리고 그 남자도.

다들 ‘모르겠다’는 말로 책임을 피했고,

결국 모든 잔해는 내 몫이었다.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상황,

가족에게 알리지 못하는 고통,

내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이 현실.

그녀는 상간남과의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늘 내게 거짓말을 해왔으니까.

사랑을 한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따뜻한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사람이니까.

그녀는 돈을 요구했다.

생활비는 당연한 거 아니냐며,

아이를 생각하자며,

자기만 상처받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의 그 한마디가 머리를 내리쳤다.

“내가? 내가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피해자로 여긴다는 걸.

외도를 선택한 사람조차도,

끝끝내 내게 책임을 돌린다는 걸.

나는 어느 날 조용히 은행에 갔다.

모든 계좌를 다시 정리하고,

카드 사용내역을 추적했다.

가계부를 다시 썼고,

그녀의 지출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그녀가 상간남과 만날 때 쓴 식당,

오피스텔 렌탈비,

옷, 향수, 화장품.

그 모든 게,

내 이름으로 된 카드에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나는 마음을 굳혔다.

“이제, 너랑은 끝이야.”

하지만 그녀는 그제야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상간남에게서 버림받은 후였을 거다.

대출받은 오피스텔은 그 남자 명의가 아니었고,

그 남자는 그녀와 함께할 미래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돌아오려 했다.

부드러운 눈빛,

조심스러운 말투,

예전처럼 웃으려는 억지 미소.

“우리 다시 해볼 수는 없을까?”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다시 시작하긴 할 거야. 근데, 너랑은 아닐지도 몰라.”

나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감정을 쏟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내 감정을 복구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잠을 자는 시간을 정리했다.

나 자신에게 매일 한 가지씩 칭찬을 했다.

“잘했다. 오늘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네.”

하루하루 쌓이다 보니,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엔 그녀의 눈치를 봤고,

그녀의 기분에 따라 나의 하루가 좌우됐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내 삶을 스스로 조율한다.

그녀는 그제야 다급해졌다.

“내가 정말 미안해. 아이를 위해서라도… 다시 생각해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더는 네 얼굴 안 보이는 게 낫겠지.”

그녀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나는 담담히 식탁을 정리했다.

사랑은,

누군가 무릎 꿇었을 때 시작되는 게 아니다.

서로 마주 보고,

서로를 지킬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제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

비빌 언덕 없이도,

내 두 발로 충분히 걸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누군가에게 내 인생의 중심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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