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그 가방, 예쁘다

한해동안 2025. 4. 17. 08:04

처음엔 그냥 가방인 줄 알았다.

깔끔한 색감, 내가 보기에 무난한 디자인, 어느 날 불쑥 그녀 손에 들려 있던 그것.

"자기야, 이거 예쁘지 않아?"

그녀가 약간 들뜬 듯 물었다.

"응. 어디서 샀어?"

"내가 좀 모아서 산 거야. 이번엔 나 자신한테 선물하고 싶더라고."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날따라 웃는 얼굴이 조금 어색했던 것 같다.

나는 그걸 그냥 기분 탓이라고 여겼다.

그래, 살다 보면 아내가 자기 위로 삼아 지른 물건 하나쯤은 괜찮지.

그래서 예쁘다고 했다.

"응. 예뻐. 잘 어울린다."

지금 생각하면, 그 한마디가 너무 역겹다.

내가 예쁘다고 말했던 그 순간,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상간남이 선물한 그 가방을 들고,

내 앞에 서서,

내 눈을 보고,

내 칭찬을 들으며 웃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건 며칠 뒤였다.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테이블 위에 잠깐 놓인 핸드폰,

그저 시간 확인하려던 그 손끝이

알림창에 뜬 메세지 하나를 읽게 만들었다.

"그 가방 마음에 들었지? 내가 고른 거야."

하트 이모티콘.

그 아래에는 결제 내역.

그녀의 카드가 아니었다.

누군지도 모를, 낯선 이름의 결제 정보.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가슴을 누가 주먹으로 내리친 듯,

숨이 턱 막혀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한 줄의 문자,

그 가방 한 개가

우리 관계 전체를 무너뜨리는 데는 충분했다.

그녀는 그날도 아무렇지 않게 내 옆에 있었다.

아이를 재우고, 설거지를 하고,

거실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매 순간이 고통이었다.

그 가방이 보일 때마다,

그녀가 그것을 어깨에 걸치는 순간마다,

머릿속엔 그 상간남의 얼굴도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그 가방, 예쁘다."

내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가장 후회되는 말이었다.

내가 느낀 건 단순한 배신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를 바보로 만들었던 그 순간들,

그녀가 애지중지하며 들고 다니던 그 가방을 칭찬했던 내 표정.

그게 연극이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역겨웠다.

"이거 비싸서 잘 못 들겠어."

그녀가 했던 말.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들킬까 봐,

내가 물어볼까 봐,

그게 무서웠던 거겠지.

그래도 묻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 순간 나는 분노보다 혼란이 더 컸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게 진짜였다는 걸.

내가 느꼈던 불안과 불신이 맞았다는 걸

받아들이기엔

너무 아팠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나는 테이블 위에 조용히 그 영수증을 꺼내놨다.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거 뭐야?"

"이름 모를 사람의 결제 내역. 그 가방 맞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침묵했다.

화를 내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러워졌고,

나는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 고요함은 평화가 아니라

마음의 폐허 위에 앉아 있는 무거운 무관심이었다.

그녀는 내가 울거나 분노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자기도 더 자극받고,

무너져 눈물 흘리고,

용서를 빌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상처받았다는 걸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럴 자격조차 그녀에겐 없다고 느꼈다.

그 가방은 아직도 현관 옆 의자에 걸려 있다.

그녀는 여전히 그것을 사용한다.

나는 그걸 보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가끔 집에 들어와 문을 열 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그 가방의 존재가

내 자존심을 조용히 찢는다.

그녀는 말한다.

"한 번의 실수였어."

"그 사람과는 끝났어."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하지만 나는 안다.

사람은 말로 바뀌지 않는다.

상처는 지운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 가방처럼 남는다.

버릴 수 없고,

어디에나 보이고,

기억보다 선명하다.

나는 오늘도 고민한다.

이 결혼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나를 무너뜨린 사람과

다시 웃을 수 있을까.

그녀를 용서하지 않아도,

이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매일 밤,

그 가방을 본다.

그건 이제 단순한 가방이 아니다.

그건 내가 받은 가장 깊은 상처의 형태다.

나는 이 상처를 끌어안고,

내일도 살아간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에.

아직, 내가 나를 다독이는 중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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