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200만원짜리 시계를 망치로 부쉈습니다

한해동안 2025. 4. 18. 06:05

서랍 깊숙이 들어 있던 그 시계를 처음 본 건 몇 달 전이었다. 반짝이는 스틸 스트랩, 아내 손목에선 어울리지 않을 고급스러움.

"이거 뭐야?"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예전에 친구가 준 거야. 그냥 선물 받은 건데, 안 차니까 넣어뒀지 뭐."

그 말이 이상하게 걸렸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땐 내가 뭘 놓치고 있는지 몰랐다.

며칠 전, 정리하던 사진첩 속에서 이상한 걸 봤다.

여자 손목과 남자 손목이 나란히 놓인 사진.

둘 다 같은 시계를 차고 있었다.

내가 서랍에서 본 바로 그 시계.

사진 아래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우리 둘만 아는 기념일, 평생 간직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내가 무심하게 지나쳤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되돌아왔다.

그녀가 시계를 안 차던 이유,

서랍 깊숙이 숨겼던 이유,

그리고 그 시계를 들킬 때조차도 당황하지 않았던 그 태도.

"친구가 줬다"는 말은, 상간남을 가리키는 우아한 변명이었다.

그 시계를 꺼내 들었다.

묵직한 금속성의 차가운 무게가 손바닥 위에 올랐다.

가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계는 내 결혼을 조롱한 징표였고,

내 감정을 기념한 그들만의 기념품이었다.

그걸 차고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괜히 오버하지 마."

"그냥 시계 하나 갖고 왜 그래?"

내가 따졌을 때 들을 법한 그 대답이 벌써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그 시계를 다시 봉투에 넣고,

그날 밤, 망치를 들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차고 앞,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그 시계를 바닥에 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딱—"

첫 번째 타격.

금속이 조금 휘었다.

"쨍—"

두 번째 타격.

유리가 깨졌다.

그 순간, 내 안에 무언가도 함께 부서졌다.

단지 시계가 아니었다.

그 시계 안에 담겨 있던 시간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온 날들,

그녀가 외면했던 나의 감정들이

함께 산산조각 났다.

나는 그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모았다.

깨어진 유리, 찌그러진 줄, 벗겨진 브랜드 로고.

그리고 작은 편지를 한 장 써서 함께 넣었다.

“당신이 내 아내에게 준 시계, 다시 돌려드립니다.

내 시간과 감정도 이 안에 들어 있었으니, 같이 가져가시죠.”

익명으로, 상간남의 회사 주소를 찾아냈다.

‘택배’라는 가장 평범한 형태로 그 봉투를 보냈다.

전달되는 시간, 그가 받아볼 그 순간을 상상하며

잠깐이나마 복수의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은 복잡하게 흘렀다.

며칠 뒤, 인사팀을 통해 연락이 왔단다.

‘이상한 택배가 왔다’, ‘내부 협박으로 볼 여지도 있다’며

회사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전해 들었다.

상간남이 ‘협박죄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는 걸.

어이없었다.

고작 시계 하나 부쉈다고,

그깟 배신의 상징 하나 부쉈다고,

고소 운운이라니.

잠시 두려웠다.

정말 법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걸까?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걸까?

하지만 나는 위협을 하지 않았다.

욕설도, 위협도, 저주도 없었다.

그저 "시계를 돌려드린다"고 썼을 뿐이었다.

감정 표현은 있었지만, 그 표현이 범죄가 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나는 조용히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결론을 들었다.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법적으로 위협 요소가 약합니다.

단, 다음 행동은 절대 하지 마세요.”

나는 알았다.

내 분노가 타당하더라도,

법은 내 감정이 아니라, 내 행동을 판단한다는 걸.

그날 이후, 나는 시계를 떠올릴 때마다

그 금속성의 파열음이 아닌

법정의 냉정한 언어가 먼저 떠오른다.

분노는 이해받을 수 있지만,

그 분노의 표현은 언제든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나는 내 감정을 충분히 드러냈고,

그 시계라는 상징도 완전히 파괴했다.

이제 더는,

그 무엇에도 휘둘리고 싶지 않다.

그녀는 아직 내 옆에 있다.

나는 아직 이 결혼 안에 있다.

하지만 시계가 깨진 그날 이후,

내 시간은 더 이상 그녀와 함께 흐르지 않는다.

나는 나만의 시간을 다시 세기 시작했다.

지금 이 일기를 쓰며 다시 다짐한다.

나는 두 번 다시 내 감정을, 내 자존심을,

그녀의 무관심에 걸어두지 않겠다고.

시계는 부서졌지만,

나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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