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유부녀인 줄 몰랐다

한해동안 2025. 4. 20. 06:07

어떤 날은 분노가 먼저 올라오고, 어떤 날은 허무함이 먼저 찾아온다.

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나는 무너졌다.

하지만 세상은 그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누가 잘못했는지, 얼마나 고의였는지, 어떤 증거가 있는지를 따진다.

나는 그게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였으니까.

나는 상간남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로 했다.

내 감정을 유일하게 제3자가 이해해줄 수 있는 통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 아내가 저지른 짓을 용서하지 못하겠지만,

그녀와 함께 그 짓을 저지른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했다.

그런데 변호사를 만나 가장 먼저 들은 질문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 사람이, 즉 상간남이, 아내가 유부녀라는 걸 알고 있었나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알고 있었는지?

당연히 알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누구인지, 결혼 생활 중인지 아닌지를

모르고 관계를 시작했다고 믿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걸 증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상간남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정말 “나 남편 있어”라고 말했을까?

아니면, “혼자야”라거나, “이혼 준비 중이야”라는 말로

진실을 감췄을까?

그가 그런 말을 믿고 관계를 이어갔다면,

법적으로 그는 고의성이 없는 사람이 된다.

도덕적으로 뭐라 하더라도

위자료 청구는 힘들어질 수 있다.

나는 황당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내 아내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몰랐어요” 한마디로 책임을 벗을 수 있다니.

그런데 법은 감정보다 냉정하다.

‘불륜을 저질렀다’보다

‘알고 저질렀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 고의성이 있고,

그래야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갔다.

기억을 뒤지고,

그녀의 SNS를 보고,

과거의 메시지를 캡처하고,

녹취 파일을 정리했다.

다행히도 몇 가지 단서가 나왔다.

“남편 출근하고 나서 나올게.”

“애들 때문에 주말엔 힘들어.”

“혹시 우리 사진 누가 보면 안 돼.”

이 정도면,

그가 그녀의 유부녀 신분을 알고 있었다는 정황이라고

변호사는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완벽한 ‘직접 증거’는 아니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이렇게 명백한 배신도,

‘증명’이라는 관문 앞에서는

의심이 된다는 사실.

한때 나는,

상간남이 아내에게 속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했다.

그가 정말 몰랐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단 하루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계속 의문만 커졌다.

그가 그녀의 집 근처에서 만남을 가졌고,

평일 낮시간만 만났으며,

주말엔 연락이 뜸했다면,

그는 정말로 몰랐던 걸까?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나는 상간남을 증오한다.

그가 우리 가정을 흔든 것도,

내 인생을 망가뜨린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더 억울한 건,

그가 지금은 “나는 피해자였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거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가정을 깨뜨린 사람에게

그 피해자 타이틀이 붙는 세상이 있다니.

법은 감정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고의성이 있었는가’만 본다.

내가 아무리 아파도,

그가 "몰랐어요" 한마디 하면

진실은 흔들릴 수 있다.

나는 그래서 더 단단해져야 했다.

감정을 정리하고,

말을 삼키고,

자료를 준비했다.

내가 받은 상처는 종이 위에 증명되지 않았고,

그저 조용한 파일 폴더 안에 담겨야 했다.

이게 내 복수의 방식이자,

내 감정을 법의 언어로 번역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나는 아직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상간남은 더더욱.

그리고 나는 오늘도 변호사와 연락하며

그의 고의성을 입증하기 위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는 그녀가 유부녀임을 몰랐을 리 없다는 내 직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나는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을

지워달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 대가를

피하지는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다시 누군가의 남편을 탐낼 때

그 기억이 그를 멈추게 하기를 바란다.

그는 결코

모를 수 없는 걸

알고도 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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