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냥 조금 멀어진 줄 알았다.
대화가 줄어든 것도,
식탁에서 나누는 눈빛이 사라진 것도,
서로의 하루를 묻지 않는 것도.
결혼 생활이란 게 그런 거겠거니,
조금 익숙해지고, 조금 지치고, 조금 무뎌지는 것일 거라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아침마다 출근 준비를 했고
아내는 여전히 아이 도시락을 쌌다.
우리의 삶은 겉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지만,
속은 서서히 텅 비어가고 있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그녀가 변했다는 걸 느끼는 데엔 많은 단서가 필요하지 않았다.
문득 사라진 웃음,
갑자기 많아진 외출,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핸드폰의 각도.
그리고 어느 날,
그녀의 핸드폰 화면 속,
낯선 남자의 이름.
그가 보내온 메시지,
그녀가 보낸 이모티콘.
그 순간,
나는 모든 숨을 멈췄다.
상간남.
그가 내 결혼의 균열 속으로 걸어들어온 남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균열을 모른 척하며
그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화를 내지도 않았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물건을 부수지도 않았다.
그저,
정지된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백하지도 않았다.
단지 고개를 숙였고,
그날 이후 우리 사이에는
말보다 깊은 침묵이 자리잡았다.
나는 그저 기다렸다.
그녀가 무릎 꿇고 사죄하길?
아니다.
단 한 번이라도,
진심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다시 바라봐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항상 나를 지나쳐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이미 마음이 떠났다는 걸
그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없어서가 아니라,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기로,
부러지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떠났다.
몸은 여전히 함께였지만,
마음은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밤을 울었다.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움켜쥐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텼다.
“돌아올까?”
그 생각을 수없이 했다.
그리고 수없이 다짐했다.
“그래도 나는 내 자리를 지키자.”
아이를 보며 웃고,
혼자 식탁을 차리고,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상들을
나는 다시 ‘의미’로 만들어냈다.
내가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나 없이도 잘 사네’ 하는 씁쓸한 생각에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을까.
가끔은 나도 그렇게 유치한 희망을 가졌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나를 본다는 걸 알게 됐다.
SNS에 올린 아이와의 사진,
새벽에 걷다 찍은 벚꽃 한 장.
그녀는 그걸 ‘좋아요’도 없이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보고 있었다.
‘그래도, 보고는 있구나.’
그 사실 하나가
마치 바람 한 줄기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여전히 내 곁에 없다.
몸은 가까이에 있어도,
마음은 먼 바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이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부러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누군가에게
내 그늘이 다시 필요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하나만으로.
“나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다만,
나 없이도 살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 역시 내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뿐이다.
사랑은 때때로 일방적이다.
그러나 기다림은 늘
스스로를 향한 존엄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도
혼자 커피를 끓이고,
아이와 숙제를 하고,
조용한 거실에서 책을 펼친다.
그리고 문득 생각한다.
그녀가 바람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더라도
나는 이 자리에서
한 사람의 남편이자
한 사람의 아버지로
서 있을 것이다.
나무는 떠날 수 없다.
하지만 바람은 돌아올 수 있다.
그 날이 언젠가 올지 몰라도
나는 그 바람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는 다시 흔들릴 준비를
스스로에게 허락해주고 싶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버티는 게 아니라
살아내고 있다.
부러지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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