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건 초여름이었다.

한해동안 2025. 6. 3. 02:50

커피가 유난히 썼다.

그날따라 썼다.

마치 예고라도 하듯이,

하루가 아니라 삶 전체가 쓰디쓴 진실로 뒤덮이던 그날.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10년 가까이 함께했던 시간,

같은 집에서 밥을 먹고, 아이를 키우며 웃고 울었던 기억들이

단 하나의 메시지 앞에서 무너졌다.

그녀의 핸드폰을 몰래 본 건 아니었다.

그냥 충전 중인 화면이 깜빡였고,

알림으로 뜬 이름이 낯설었고,

내용이… 너무 친밀했다.

“오늘도 당신 생각만 했어요.”

“조만간 또 만날 수 있겠죠?”

처음엔 스팸인가 싶었다.

그런데 대화창을 열자마자

내가 아는 모든 세상이

순간 멈췄다.

그녀가 보낸 메시지에는

내게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말투,

나에겐 보여준 적 없던 웃음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상간남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처음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녀가 옆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도,

아이와 장난을 치고 있을 때도

나는 온몸에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를 두르고 있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무너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무너졌는데

그걸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며칠이 지나고

나는 그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람 누구야.”

그녀는 처음엔 발뺌했다.

그러다 결국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회사 동료야.

그냥… 위로가 필요했어.

당신이 너무 바빠서,

나는 너무 외로워서…”

그 말이 내 가슴을 찢었다.

그래, 나도 바빴다.

일하느라, 벌어야 했으니까.

당신이 원하는 삶, 아이가 필요한 안정된 집,

그걸 위해 매일 야근을 하고

주말이면 쓰러져 자는 게 다였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였는데,

당신은 그 시간에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내주고 있었던 거구나.

그날 밤,

나는 아이 방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자고 있는 아이 얼굴을 보며

숨을 쉬는 것도 미안했고,

아빠라는 이름이 부끄러웠다.

이런 부모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나 싶었다.

내 감정은 분노보다

허무가 더 컸다.

아내를 미워하는 마음보다

‘내가 지금 뭘 믿고 살았던 걸까’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회사에서도,

일상에서도,

나는 점점 텅 비어갔다.

회의 도중 멍하니 있다가 팀장이 부르는 소리에 겨우 고개를 들었고,

점심시간에도 밥 대신 커피만 들이켰다.

퇴근 후 집으로 가는 길엔

라디오 소리도 거슬려

끄고 달렸다.

차 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소리도 없이.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아니라 영혼이 아픈 느낌.

그건 처음이었다.

세 달 동안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그뿐이었다.

아이의 웃음도,

동료의 농담도,

거리에 핀 벚꽃도,

내겐 아무 감흥이 없었다.

하루는 친구가 말했다.

“야,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얼굴이 다 죽어있어.”

그 말에

처음엔 코웃음을 쳤다.

“정신과? 내가 왜?”

하지만 그날 밤

혼자 있는 방 안에서

거울을 보다 멈췄다.

나는

죽어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예약을 했다.

정신과.

상담실에 앉자마자

말도 못 꺼냈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아내가… 외도를 했어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에요.

근데 그걸 받아들이는 내가 더 괴로워요…”

선생님은 조용히 듣고 계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계산기를 두드리세요.”

“…네?”

“지금 감정으로 판단하면 본인만 무너집니다.

아침에 일어났는지,

식사했는지,

아이를 챙겼는지,

출근했는지…

그걸 하나씩 점수로 매기세요.”

그 말은 마치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는 매일 감정에 짓눌려

살고 있는 걸 잊고 있었다.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울고 있다는 것보다,

살아가는 행동이에요.”

그날, 나는 처음으로

정신과 약을 처방받았다.

하루에 하나.

잠들기 전.

처음엔 망설였다.

‘약 먹는 남자’가 된다는 게

창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날 밤 약을 먹고 처음으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조용한 변화가 시작됐다.

아침에 눈을 떴다.

아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커튼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나는

아주 조용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오늘도 계산기를 두드린다.

기상 – 1점

아이 등교 챙김 – 1점

출근 – 1점

회의 – 1점

점심 – 1점

퇴근 – 1점

아이와 웃음 – 1점

총 7점.

내 삶의 점수.

아내의 외도는

내게 상처를 주었지만,

결국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지금

무너지지 않고 있다.

휘어졌지만, 부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이렇게 써본다.

“나는 괜찮아지고 있다.”

“이혼을 선택하든, 용서를 선택하든

그 중심에 ‘나’가 있다.”

누구든 무너질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내 이름을 부를 수 있느냐는 거다.

나는 지금,

조용히

내 이름을 되찾는 중이다.

#아내외도 #남편우울증 #상간남소송 #정신과치료 #이혼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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