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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혼의 그늘〉

서류상의 결혼은 끝이 났다. 판결문을 받아든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주방으로 가 커피를 내렸다.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은 멍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그렇게 법적 부부가 아니게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집에 살고 있다. 딸이 고3이기 때문이다. 그녀도 동의했다. 이 시기만은 조용히 지나가자고. 아이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다는 점은 우리 둘의 마지막 남은 합의였다.​ 서로를 향한 애정은 없다. 그렇다고 미움도 사라졌다. 무뎌졌다. 감정이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말라붙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상태를 사람들은 ‘사실혼’이라고 부른다. 법적으로는 남남이지만, 여전히 함께 살며 아이를 키우는… 말하자면 ‘가족인 척’ 살아가는 ..

같이 살아간다는 말이, 꼭 사랑은 아니더라

나는 지금도 같은 집에서그녀와 산다.단지 '같이 산다'는 것일 뿐우리는 함께 살고 있지는 않다.​​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건지난 겨울이었다.겨울 치곤 따뜻한 날이었는데,내 가슴 안은 눈보라가 몰아쳤다.​그녀가 아이 사진을 고르기 위해사진첩을 넘기다 말고,톡 알림을 무심코 닫는 모습이 이상했다.그게 전부였다.​하지만 이상하게도,그날 밤 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들여다봤고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우리 오늘도 너무 좋았어요.’그 한 문장에,나는 그대로 무너졌다.​​처음엔 말없이 참았다.당장 소리를 지르거나짐을 싸서 나가고 싶기도 했지만아이를 생각하니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한 집에 살면서도그녀에게 “나 다 알아”라고 말하지 못한 채미친 듯한 하루하루를 보냈다.​그녀는 아직도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밥을..

사랑은 현재형

오늘 아침, 딸아이가 수학 문제를 풀다가 문득 말했다. “아빠, 넷플릭스에서 ‘아임 히어로’ 봤어?”​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실은 며칠 전 혼자 밤에 그 영화를 봤다. 불도 다 끄고, 이어폰을 끼고, 조용히. 임영웅의 무대, 환호하는 사람들, 눈물과 박수, 떼창. 그 장면 하나하나가 가슴에 박혔다.​그 순간 나도 깨달았다. 나 역시 그 무대에 위로를 받았다는 걸.​아내의 외도를 처음 알게 된 날을 잊지 못한다. 감정이 아니라 감각이 먼저였다. 손끝이 떨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그때 나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실수였어. 진심은 아니었어. 다시는 안 그럴게.”​ 하지만 그 실수가 현실이 된 건, 낯선 번호로부터 날아온 출생신고서 사본 한 장 때문이었다.​‘양육비 협의..

햇살은 다시 뜨고, 우리는 끝내 살아남는다.

처음엔 그랬다.믿기지 않았다.불과 몇 시간 전,아이의 웃음소리에 반응하던 그 여자가지금은 다른 남자의 품에서 숨소리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숨이 막혔다.공황.그 단어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내 심장은 부서졌고, 머리는 텅 비었고,몸은 굳어버렸다.​‘아니야, 꿈일 거야.’​자고 일어나면아내는 평소처럼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을 테고,아이들은 이불 속에서“아빠~” 하고 부르며 내 품에 안겨올 거야.그렇게 믿고, 잠들었다.​그리고 눈을 떴을 때.지옥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나는 가장이었다.사랑했고, 헌신했다.다투기도 했지만,절대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던 내 가정을나는 목숨처럼 지켜왔다.​그런데.그런데 말이야.​한순간이더라.정말 한순간.​‘형, 미안해. 사실 나… 그 애랑…’​그 문장을 듣는..

나에게 묻고, 나에게 답하다

오늘도 혼자 깨어났다. 침대의 오른쪽이 여전히 차갑다. 예전엔 그녀가 누워 있던 자리였다. 이불을 넘기고 앉아 커튼을 젖히며 스스로에게 묻는다.​"나는 왜 아직도 이 자리에 있는 걸까?"​Q. 언제부터였을까?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이? A. 몇 달 전, 그녀가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기 시작했을 때. 새벽까지 화면을 바라보며 웃는 모습을 보고 직감했다. 감정은 논리보다 빨랐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Q. 어떻게 알게 되었나? A. 어느 날, 그녀가 샤워하는 동안 무심코 휴대폰을 봤다. 잠금은 풀려 있었고, 그 속엔 메시지들이 있었다. 낯선 번호. 낯선 호칭. 그리고 사진들. 그녀와 다른 남자. 둘만의 웃음. 손을 잡은 장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Q. 그녀에게 물어봤나? A. 물었다. 침묵했다. 그러곤..

믿고 싶었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내가 아는 아내였고,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허투루 흘러간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감정의 흔들림과 회사 지인들의 말들, 우연히 보게 된 사진 한 장이 나를 탐정 사무소 문 앞에 세웠다.​문 앞에서 두 번을 망설였다. 세 번째, 나는 문을 열었다. 그날의 공기 냄새까지 기억난다. 나는 말했다.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 오해라면 다행이고, 아니라면… 준비는 해야 하니까요."​며칠 후, 첫 보고서를 받았다. 그녀는 상간남과 퇴근 후 함께 택시를 탔고, 멀지 않은 호텔 로비로 들어가는 장면이 캡처돼 있었다. 이어진 메시지 복원, 위치 기록, 호텔 입장 시각과 퇴장 시각. 모든 게 일치했다. 나는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그건 ..

이혼을 결심하기까지 내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

그녀가 떠난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숫자보다 감정이 먼저 셌다. 아내는 내게 이별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물었다. "이혼했냐?" 아니라고 답했지만, 그건 법적으로만 아니었지, 마음은 이미 오래전 끝나 있었다.​그러다 어느 날, 장모님이 전했다. "그 애가,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더라."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알았다. 이건 기쁜 소식이 아니란 걸. 돌아오는 이유가 나를 향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는 걸.​그녀는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현관문 앞에 섰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눈물이 상간남에게 버림받은 감정의 파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내 감정과 직면해야 했다.​왜 돌아왔는가? 정말 나를 다시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었다...

이혼을 앞둔 어느 날의 기록

이혼 소장이 접수된 지 며칠째인지 세는 것조차 무의미해진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늘 같다. "그녀에게 내 돈을 줘야 한다고?"​ 나는 아내와 9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 남들은 반반 결혼이라며, 부부가 함께 이룬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반반이라는 말 속에는 무임승차와 감정 노동의 불균형이 숨어 있다는 걸. 공동 명의로 된 아파트, 대출을 내가 다 갚았다. 매달 빠듯하게 살았지만 아이 교육비와 생활비, 모든 건 내 통장에서 나갔다. 나는 가족을 위해 달렸고, 그녀는 그 시간 동안 마음을 딴 데 줬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재산의 절반을 요구한다. 상간남과의 관계를 들킨 후에도 당당한 얼굴로. 말문이 막혔다. 법원은 외도를 해도 재산은 나누라고 한다. "그건 그거고, ..

불륜 직전의 경계

우연히 보게 된 몇 장의 사진, 사소하게 지나갔던 회식 뒷이야기, 그리고 주말 오후의 낯선 정적. 모든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엔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였고, 아내의 얼굴을 보며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신뢰로 덮었다. 하지만 행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나하나, 조용히 나를 밀어냈다. 그날 회식 사진 속 아내는 자연스럽게 상간남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웃고 있었다. "웃기지 마~"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여 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 보기엔 장난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친근함'이 아닌 '사적 감정'을 읽었다. 그건 장난처럼 포장된 감정의 위장이었다. ​그 후, 나는 조금씩 거리감을 두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주말 오후, 아..

울어도 되는 날

아침이 왔다.눈을 뜨는 게 싫었다.창밖에서 햇빛이 들이치는데도,내 마음속은 여전히 한겨울이었다.​이불 속에서 조용히 손을 꺼내 휴대폰을 들었다.카톡 알림, 뉴스 속보, 학부모 단톡방.그중에서 가장 눈에 밟힌 건전날 캡처해둔 사진 한 장이었다.아내와 상간남이 찍힌 사진.서로 어깨를 기대고 웃고 있던 그들.그 사진을 바라보며 나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그녀는 지금도 내 옆방에서 잔다.아이 방에선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나는 여전히 이 집의 가장이고,가족이라는 구조의 한 부분이다.하지만 마음은, 그 구조의 바깥에 버려져 있었다.​언제부터였을까.그녀와 내가 말이 사라진 건.아이 숙제 이야기 외엔 아무것도 나누지 않았다.그녀는 말없이 외출했고,나는 말없이 기다렸다.그녀는 사랑받지 못해서 외로웠다고 말했지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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