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한해동안 2025. 6. 23.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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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터였다. 나는 입을 닫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녀를 이해하고 싶어서 말을 걸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가 늦게 들어오면 무슨 일 있었는지 물었다. 점점 늦어지는 귀가 시간에 대해서도, 변명처럼 들리는 이유들에 대해서도 말없이 넘겨보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물음에 돌아오는 건 피로 섞인 짜증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왜 또 물어봐. 그냥 일이 많았다고 했잖아."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예전에는 나를 기다리던 그 눈빛이, 이제는 왜 아직도 집에 있냐는 듯 나를 피했다. 처음엔 믿고 싶었다. 진짜 바쁜 거겠지, 업무에 지쳤겠지. 하지만 어느 날, 그녀의 전화기 화면에 뜬 익숙하지 않은 이름을 보고 나서, 나는 이 모든 감정의 균열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내게 아무런 의미 없는, 하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진 이름이었다. 메시지를 봤다. "오늘 네 목소리를 못 들어서 허전했어." "네가 웃어주면 세상이 달라 보여."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니, 심장이 내 안에 있다는 감각 자체가 사라졌다. 감정이 무뎌졌고, 숨이 막혔고,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날 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식사를 했고, 아이와 대화를 나눴고, 그녀가 샤워를 마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 혼자만의 복수를 준비하듯 침묵했다.

하지만 나는 복수할 줄 몰랐다. 싸우는 법도, 떠나는 법도 몰랐다. 그저 내 안에 갇혀 스스로를 다그치며 버텼다. 왜 나는 몰랐을까. 언제부터 그녀의 마음이 나를 떠났던 걸까. 우리는 같은 공간에 살면서 언제부터 서로에게 타인이 되었던 걸까.

그녀는 잘 웃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땐. 집에서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던 그녀가, 친구들과 통화할 땐 목소리가 살았다. 그 웃음이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의 웃음에서 배제된 사람이 되었고, 어느새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익명의 존재가 되었다.

"나도 지쳤어. 당신 눈치 보는 것도, 말할 때마다 비난받는 것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비난을 받고 있던 건 나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무심하다 했고, 말을 꺼내면 트집 잡는다 했다. 결국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내 감정을 말해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외도. 그 단어가 내 삶에 들어온 이후로 나는 달라졌다. 의심이 시작되자 모든 일상이 의심스러웠다. 그녀의 외출, 그녀의 미소, 그녀의 휴대폰. 나는 감정의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매일 그녀의 거짓과 나의 진심 사이에서 흔들렸다.

그녀는 외도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미안해. 내가 나빴어. 하지만 나도 힘들었어."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그녀가 힘들어서 한 행동이, 나를 얼마나 무너뜨렸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나는 질문을 멈췄다. 내가 아파도, 내가 힘들어도, 그녀는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어디에도 꺼낼 수 없었다. 친구에게 말하면 수치였고, 부모에게 말하면 상처였다. 결국 나는 모든 이야기를 나 혼자 삼켰다.

나는 매일 글을 쓴다. 아무도 모르는 계정에,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올린다. 내 감정의 쓰레기통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혼돈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울음으로, 어떤 날은 분노로, 어떤 날은 공허함으로 그날의 일기를 채운다. 그리고 그 위에 나지막이 써넣는다.

"오늘도 나는 버텼다."

누군가는 말한다. 외도는 선택이라고. 하지만 그 선택의 대가는 너무나 크고, 남은 사람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는다. 나에게 외도는 죄이기 이전에, 존재의 파괴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나 자신을 지키고 싶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내가 망가지는 것을 아이가 보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나는 휘어져 있다. 아직 부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바람 앞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누구도 모르게 흔들리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매일을 살아간다.

그녀는 여전히 같은 집에 있다. 같은 식탁, 같은 공간, 같은 잠자리.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부부가 아니다. 나는 단지 아이의 아버지로, 그녀는 아이의 어머니로,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타협한 동거인일 뿐이다.

어떤 밤은 너무 괴롭다. 그녀가 잠든 옆에서 숨을 죽이고 눈물을 삼킨다. 다 잊은 줄 알았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들 때, 나는 스스로를 달랜다.

"말하지 마. 괜찮아. 내일은 좀 나을 거야."

이 글을 쓰는 오늘, 나는 다시 입을 다문다. 내 감정이 무시당하는 아픔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기에. 언젠가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날이 오기를 바라며, 나는 조용히 이 고요한 지옥 속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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