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카드값 200만 원, 누구를 위해서일까?

한해동안 2025. 3. 29. 22:53

 

"카드값이 200?"

손에 들린 영수증을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피부과. 미용 시술. 200만 원.

"뭘 하면 200이나 나와?"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분명, 그 순간엔 감정 없이 말했을 것이다. 그저 놀람과 궁금증.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보고, 내 말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관리를 받았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던 그녀는 시선을 들지 않은 채 대꾸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 말이 전부였다. 그리고 모든 게 시작되었다.

그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나를 찔렀다.

"뭐?"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 무슨 시술인데 200씩이나 해?"

말을 돌려보려 했지만, 이미 화살은 날아갔다.

"다른 집 남편들은 와이프가 관리하면 좋아한대. 근데 넌 왜 이렇게 쪼잔해?"

그녀의 말은 곧장 심장을 찔렀다.

손이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풀렸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내가 쪼잔해서 묻는 게 아니잖아."

"그럼 뭔데?"

"그냥… 이게 꼭 필요한 거였어?"

어이없다는 듯 웃는 그녀의 얼굴.

그 웃음이 낯설었다.

너무 낯설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보험 되는 것도 아니고, 미용 시술은 원래 비싸. 이게 그렇게 문제야?"

"영수증 좀 보여줘."

"뭐?"

"어떤 시술 받았는지 알고 싶어서."

그녀는 영수증을 내던졌다.

"진짜 쪼잔하다."

나는 손에 들린 영수증을 바라봤다.

종이 한 장, 숫자 몇 개, 그리고 그 아래 적힌 시술 항목들.

레이저, 리프팅, 피부 재생.

그녀는 단지, 나이 든 자신이 싫었을까.

아니면… 상간남에게 더 예뻐 보이고 싶었던 걸까.

그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외도를 알게 된 건, 그보다 며칠 후였다.

처음에는 확신이 없었다.

대화의 뉘앙스,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

외출 전 바뀐 향수, 바뀐 메이크업.

그녀는 나를 떠난 적 없다고 했다.

“단 한 번이었어.”

그 한 마디가 더 고통스러웠다.

한 번이면 된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 한 번이 내 마음을 산산조각 낼 거란 건 몰랐을까.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문하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가 바라는 표정, 말투, 침묵.

그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해 연기한 나의 행동 같았다.

그녀는 나를 안심시키려 했고,

나는 안심된 척했다.

왜냐면, 내가 무너지면 아이들이 무너지니까.

그 이유 하나로, 나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밤마다 머릿속이 울렸다.

그녀의 말, 손짓, 눈빛.

상간남과 나눈 대화가 무엇이었을까,

그 남자가 그녀를 어떻게 쳐다봤을까.

나는 생각으로 지옥을 헤맸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말하려고 했어. 근데 무서웠어."

"무서웠어? 나는 무섭지 않았을 것 같아?"

나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면 지는 것 같았다.

눈을 붉히지도 않았다.

감정은 나에게 사치였다.

그녀는 변하려 했다.

아니, 변한 척했다.

스스로 자책하는 말들을 내뱉고,

"미안해, 정말 미쳤었어."

"다시는 안 그럴게."

그 말을 하루에 수십 번 되뇌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내 감정조차.

나는 외도를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신뢰를 다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용서를 구하고,

나는 신뢰를 묻고 있었다.

"네가 원해서 관리한 거야, 아니면 누군가를 위해서 한 거야?"

그 질문이 가장 본질이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 대답보다 더 큰 고백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건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나는 내 마음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아침에 혼자 마시는 커피,

그녀와는 나누지 않는 대화들.

나는 ‘나’를 되찾고 있었다.

그녀의 외도는 나를 무너뜨렸지만,

완전히 부서지게 하지는 못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며 말했다.

"네가 네 편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제, 나의 편이다.

그녀가 다시 나를 배신해도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이젠 내가 나를 안아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위해 관리받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걸

진심으로 보여주기 전까진

나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거리 두고 서 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지키는 일은

그 어떤 사랑보다도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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