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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의 끝에서 – 그가 내린 결론

한해동안 2025. 3. 31. 21:05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는 말이 뭔지 그제야 알았다. 누가 내 뒤통수를 세게 친 것도 아닌데, 중심을 잡기 어려울 만큼 휘청거렸다. 온몸이 굳고, 심장이 뚝 하고 멈추는 기분.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라는 의문만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리고 그 의문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뭐였던가. 매일 밤 같이 밥을 먹고, 아이를 재우고, 같은 이불을 덮었던 그 시간이 대체 뭘 의미했단 말인가.

처음엔 무너졌다. 그리고 곧 나를 부끄럽게 할 만큼 더러운 상상을 했다. 나도 똑같이 해볼까. 상간남이라는 존재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똑같이 해버리면 이 분노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을까. 그녀가 가볍게 던졌던 말들, 거짓으로 포장된 일상들, 그 안에서 나는 얼마나 우스웠을까. 스스로가 비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감정의 끝에 도달했을 때 깨달았다. 그렇게 하면, 나는 나를 더럽히게 된다는 걸.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건 복수가 아니라, 나를 망치는 일이란 걸.

그녀는 울었다. 그 사실이 들통났을 때, 한참을 울었다. 눈물의 의미를 해석할 힘조차 없었다. 후회인지, 발각된 공포인지, 아니면 정말 미안함인지. 그 눈물이 진심이든 아니든, 나는 그 앞에서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정이 너무 복잡해서, 입을 열면 비명처럼 터질까 봐. 가슴 한가운데 뭔가 단단한 돌덩이가 놓인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너 정말 미안한 거야?"

그 말을 꺼내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고, 심장은 요동쳤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대답 없는 침묵은 모든 말보다 더 날카롭게 마음을 찔렀다. 내가 원하는 건 변명이 아니었다. 그저 진심이 듣고 싶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혼돈의 시간 속에서, 적어도 그녀의 목소리로 그 시간을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 작은 존재가 이 모든 걸 알게 될까 봐, 혹은 어느 날 이 기억 속 한 장면으로 남을까 봐. 아이는 여전히 순수하게 엄마를 찾았고, 나를 따라다녔다.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아빠, 왜 요즘 말 안 해?" 그 순간, 나는 마음이 무너졌다. 나의 고통은 그저 내 고통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비열하게 느껴졌다. 아이에게 죄를 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감정을 삼키고, 더 삼켰다.

그녀는 용서를 구했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가정을 유지하고 싶다고.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역시 고민했다. 내가 원하는 게 이 관계의 복원인지, 아니면 나 혼자의 회복인지.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뭘까?" 복수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진짜 내가 바라는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나는 결정을 내렸다. 당장은 아니다. 지금은 함께 지내되, 나 자신을 우선하기로. 그녀가 나에게 상처를 준 만큼, 그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내가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다루기 시작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는 일부러 산책을 나갔다. 아이를 꼭 안고, 그 체온을 느끼면서 안정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밤마다, 그녀가 잠든 뒤 혼자 조용히 울었다. 그 울음은 이제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그냥 내 안의 잔해를 치우는 과정이었다.

"한 번 더는 없다."

이건 내 경고가 아니라, 내 다짐이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사람이고 싶다. 그녀가 진심으로 변하려 한다면, 나도 그 진심을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다시금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땐 미련 없이 떠날 것이다.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참는 아버지가 아니라, 존엄을 지키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다만, 시간 속에서 내가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상처 속에 있다. 하지만 그 상처 속에서도, 나는 걸어가고 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를 되찾고 있다. 이 길의 끝이 어디일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오늘도,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내 감정을 천천히 끌어안는다.

나는 지금, 회복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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