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신뢰가 깨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해동안 2025. 4. 4. 16:31

그녀는 요즘 따라 말수가 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를 향한 말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사소한 것들을 지적하고,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를 꺼내어 내가 무심했다며 탓했다. “운동 좀 해. 얼굴이 너무 처졌어.”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멈췄다. 내가 사랑했던 그 따뜻한 말투는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공기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그때야 비로소 느꼈다.

‘왜 이렇게 날 깎아내리는 거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지쳤나 보다,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그렇게 넘겼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너 그때 나 임신했을 때 왜 그렇게 일만 했어?” “자기 가족한텐 잘하면서, 우리 친정엔 왜 그랬어?” 상처 주는 말들이 의도적인 듯 반복됐다. 나는 점점 작아졌고,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다.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휴대폰을 보게 됐다. 아주 짧은 찰나였다. ‘오늘도 보고 싶었어.’ 낯선 이름, 그러나 너무나 익숙한 말투. 그 메시지 하나가 내 세상을 조용히 무너뜨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 고막이 쿵쿵 울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을 그제야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저 조용히, 모든 것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모르는 시간, 내가 모르는 공간에서 그녀와 상간남이 함께 있었던 게.’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그녀는 웃고, 기대고, 마음을 나눴다. 그 사실이 숨막히도록 아팠다. 내가 믿고 지켜온 결혼 생활이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 나는 매일 밤 스스로를 자책했다. 내가 더 따뜻했더라면, 더 자주 웃어줬더라면, 무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다 깨달았다. 나 혼자 모든 걸 안고 가려고 애쓰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그녀는 말없이 내 앞에서 무너진 가정을 정당화하려 했다. “내가 외로웠어.” “당신은 항상 바빴잖아.” “나도 나를 모르겠어.” 그녀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상처받은 피해자인 양 자신을 포장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제 감정적으로 휘말리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나는 그녀의 감정을 이용해 증거를 모았다. 변호사에게 상담을 받았고, 상간남의 정보를 수집했고, 모든 기록을 정리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조용한 가장이었지만, 속으론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내 인생을 되찾기 위한 절차였다.

그녀는 점점 더 거리를 두며 살았다. 같은 집, 같은 방에 있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이를 데리고 나가거나, 연락 없이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어디 갔다 왔어?”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내가 여전히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한 타이밍을.

어느 날, 나는 말했다. “우리, 이대로 계속 살아야 해?” 그녀는 눈을 피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우리 아이는 다 알고 있진 않지만, 감정은 느낄 수 있어. 계속 이렇게 살면, 그 아이의 마음도 병들어.” 처음으로 그녀는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았다. 단지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을 보고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 그럴 이유도, 의지도 없다. 내가 붙잡고 싶었던 건 사랑했던 그녀였지, 나를 배신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이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후회하든, 아니든, 나는 내 삶의 방향을 정했다. 증거는 충분했고, 절차는 준비됐다. 나는 아이의 삶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좋은 남편’이라는 허울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상처받지 않고 아이와 건강하게 살아가는 삶이다. 복수도, 용서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다시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나를 다시 믿고 있다.

지금도 가끔 그녀의 웃음이 떠오른다. 내가 사랑했던, 함께 미래를 그렸던 그 웃음. 하지만 그 웃음 속에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섞였다는 걸 알아버린 지금, 나는 더 이상 그 장면을 회상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감정의 일부로, 받아들일 뿐이다.

나는 이제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녀 없는 삶. 그녀와 있었지만 외로웠던 시간보다, 나 혼자지만 단단해진 삶으로. 이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누군가는 평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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