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더 처졌어. 헬스라도 다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맞추려는 것도 아닌 채 거울을 보며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는 그녀의 표정이, 낯설다 못해 차가웠다.
“뭐?”
“헬스장 가서 PT라도 받아. 나이 들어서도 관리해야지, 그렇게 살 거야?”
그 말이 꽂혔다. 전에 없던 말이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웃으며 “우리 돼지, 살쪘어도 귀엽다” 하며 배를 툭툭 쳤을 사람인데, 이제는 매일 무언가를 지적하고 불편해했다.
처음엔 나를 정말 걱정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반복되는 비난, 그 속에 깔린 냉소는 진심과 거리가 멀었다.
“왜 임신했을 때 일만 했어?”, “너 우리 친정 무시해?” 평소엔 하지도 않던 말을 끄집어내며 트집을 잡았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건 정당화를 위한 서곡이라는 걸.
사람이 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외도의 냄새는 이처럼 일상 속 감정의 결을 바꿔버린다. 나는 그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내 마음도 천천히 식기 시작했다.
예전엔 그녀가 뭐라고 해도 설득하거나 변명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나는 ‘왜 이러는 거냐’는 질문 대신, 그녀의 말에 짧게 대답하고, 관찰하기로 했다.
“그래, 미안해. 신경 못 써서.” 그렇게 대답하며 웃어보였다.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내가 반박하지 않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앞으로 더 잘할게. 너한테도, 너희 친정에도.” 방심하게 만드는 건 언제나 가장 조용한 전술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부터 철저히 준비했다. 그녀의 말투, 표정, 외출 전의 휴대폰 움직임, 그리고 침묵. 싸우지 않았다. 대화도 줄였다. 대신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진, 문자, 계좌내역, 통화기록… 조용히, 아주 조용히.
논쟁이 시작될 만한 순간에도 짧게 말했다. “그래, 알았어.” “응.” “다음에 얘기하자.” 그녀는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나는 더 이상 휘말리지 않았다. 분노는 감정을 망치지만, 침착함은 싸움의 판을 통째로 바꾼다.
그녀는 내가 무관심해졌다고 생각했다. 맞다. 이제 나는 그녀가 말하는 그 감정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더 불편해했고, 더 자주 화를 냈다. 아이에게도 짜증을 냈고, 식탁에서 혼자 밥을 먹는 날이 늘어났다.
어느 날, 나는 단호하게 물었다. “너 요즘 왜 그래?” 그녀는 눈을 피했다. “뭘?” “너, 나한테 일부러 트집 잡는 거잖아.” 그녀는 말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도대체 누구랑 비교하고 있는 거야?” 정적 속에서,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어떤 불안함을 읽었다.
“나, 이제 더는 못 참아.” 내 말은 조용했지만 분명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고, 문은 천천히 닫혔다.
이건 끝의 시작이었다. 나는 다시는 그 문 앞에 서지 않았다. 대신 변호사를 만나 준비했다. 불필요한 감정은 없앴다. 사랑은 이미 다한 것, 미련은 더 이상 남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당황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을 것이다. 처음엔 이혼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아이 때문이라며 눈물도 보였다. 하지만 난 알았다. 그 눈물은 후회의 눈물이 아닌, 발각의 공포였다.
상간남의 이름도 알게 됐다. 집 근처 카페에서 둘이 함께 찍힌 CCTV도 확보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증거를 모았다. 변호사는 조용히 말했다. “충분합니다. 이제 당신이 주도권을 가지실 차례예요.”
이상하게도 마음은 평온했다. 고통은 오래됐고, 상처는 다 아물진 않았지만 딱지가 졌다. 더는 울지 않았다. 아이를 위해, 나 자신을 위해, 나는 이 싸움을 정리해야 했다.
이제 그녀는 나를 불안하게 바라본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나올지를 걱정하며 눈치를 본다. 예전의 나는 매달렸고, 용서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이제는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가 되찾았으니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그녀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 더는 그녀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나의 시간이다. 나의 판단, 나의 선택, 그리고 나의 평화를 위한 시간.
그녀는 흔들리고, 나는 버틴다. 그리고 이젠, 내가 끝을 결정한다.
'바람 바람 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 단단해지기 (1) | 2025.04.04 |
---|---|
신뢰가 깨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0) | 2025.04.04 |
외도의 끝에서 – 그가 내린 결론 (0) | 2025.03.31 |
카드값 200만 원, 누구를 위해서일까? (2) | 2025.03.29 |
떠나가는 사람들 (0) | 2025.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