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남겨진 사람들

한해동안 2025. 4. 4. 16:43

오늘 아침, 집 안은 너무도 조용했다.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는데도 아내의 인기척이 없었다.

부엌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아이 방에서도 그녀의 흔적은 사라져 있었다.

옷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신발장도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급히 도망치듯이.

거실 테이블 위엔 하얀 서류 한 장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혼 소장’.

그 한 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무릎이 꺾여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짜, 이게 끝인가…”

나는 한동안 말도 못 하고 서류만 들여다봤다.

도장을 찍은 것도, 내용을 적은 것도 모두 그녀였다.

가출도 모자라서, 이젠 이혼까지 먼저 요구한 것이다.

유책배우자가 먼저 이혼을 제기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이제 법적 절차까지 밟으며,

스스로 이 관계를 정리하려 하고 있었다.

아이 방 문을 열었다.

작은 이불 속에 아이가 곤히 자고 있었다.

그 조그만 숨소리가 유일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아이까지 두고 간 거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니라, 이 아이를 어떻게 두고 갈 수 있는지.

사랑하지 않게 된 건 나일지 몰라도,

아이한텐 그런 이유가 적용될 수 없잖아.

나는 그제야 의심했던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상간남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수는 없었다.

무책임함의 끝, 그것은 ‘도망’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녀는 도망친 것이 맞았다.

변호사를 찾아갔다.

서류를 내밀며 조용히 말했다.

“이혼, 기각하고 싶습니다.”

변호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외도의 증거는 확보되셨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상간남과 함께 있는 사진, 메시지, 카드 결제 내역.

하나하나 모으는 동안 내 가슴은 갈가리 찢겼지만

이제는 그 모든 걸 내 무기 삼아야 했다.

“아이만큼은 내가 지키겠습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변호사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법적으로는 이혼 기각이 가능하고,

양육권도 확보 가능합니다. 다만 감정은 따로 다루셔야 할 겁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감정이 감당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며칠 뒤, 그녀가 변호인을 통해 연락해왔다.

“그냥 조용히 이혼해줘.”

나는 조용히 되물었다.

“아이에겐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네가, 이제 와서 편하게 이혼을 원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오히려 진심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후회도 미안함도 없었다.

그저 빨리 끝내고 싶다는 이기적인 태도뿐이었다.

나는 정식으로 이혼 기각을 신청했다.

그리고 상간남과의 동거 증거를 법원에 제출했다.

아이의 생일조차 잊은 그녀의 무책임을 담은 자료들도 함께였다.

내가 증명하려는 건

단지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이 아이에게는 누가 필요한지,

누가 함께할 수 있는 부모인지였다.

결국, 법원은 나의 손을 들어줬다.

이혼은 기각되었고, 양육권은 나에게 주어졌다.

그날, 아이가 내 품에 안겨 웃는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이건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그녀는 조건부로 이혼을 다시 제안해왔다.

나는 그제야 감정이 아니라, 현실을 택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은 없었고,

내가 원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양육권은 내게 남긴다. 위자료도, 책임도 네가 져야 한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서명했다.

나는 그 서류를 들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와 마주 앉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너를 지킬 거야. 두 번 다시 너를 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아이의 작은 손이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온기 속에서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모든 게 무너졌지만,

남은 이 아이 하나만큼은 지켜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제 나는 그녀를 기다리지 않는다.

후회도 없다.

이 세상에 수많은 상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상실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나를 잃고 싶지 않다.

오늘 아침도 아이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작은 손으로 포크를 쥐고 있는 아이를 보며

나는 다시 다짐했다.

“나는 이 아이의 아빠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살아간다.”

그녀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하지만 그 끝이 내 인생의 끝은 아니다.

나는 이제,

진짜 나를 위한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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