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아내의 반성문

한해동안 2025. 3. 26. 18:18

거실 책상 위에 놓인 A4용지 한 장.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았던 탁상 조명 아래,

그 종이는 너무도 조용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종이를 들어 올렸고,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 "이번 불미스러운 일에 있어서 왜 그랬는지 설명하기 전에…

먼저 당신이 싫어져서 그런 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어요."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했다.

> “그래. 또 시작이네.

늘 그렇게 시작하더라.”

---

그녀는 내 아내였다.

8년을 함께 살았고,

그중 6년은 부모로도 살아왔다.

같이 대출을 갚고, 아이를 키우고,

서로의 가족 문제를 감싸 안으며

‘우리’라는 이름으로 버텨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눴다.

정확히는,

정신적으로 의지했고,

감정적으로 빠졌고,

육체적으로도 무너졌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숨겼다.

---

나는 그녀의 반성문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 “회사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어요.

그 사람은 그냥 이야기 나누기 편한 선배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퇴근길에 술을 한잔 하다 보니…”

‘그 사람.’

그게 바로 상간남이었다.

나와 한 번도 인사하지 않았고,

같은 공간에서 마주친 적도 없는 이름 없는 남자.

하지만 그가 내 가정을 부쉈다.

---

더 내려가니 이런 문장도 있었다.

> “그 사람은 잘생기지도 않았어요.

정말 그냥 편한 상대였어요.

그걸 넘어서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나는 그 종이를 던졌다.

잠시 뒤 다시 주워서,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 “남자로서 좋아했던 건 아니에요.”

그 말이 오히려 더 모욕적이었다.

그녀는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그저 쉬운 도피처로서

다른 남자를 택한 거였다.

---

나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반성문 아래 적었다.

> “그래서 나는 너를

아내로 보지 않기로 했어.”

---

그날 저녁,

아내는 퇴근하자마자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 “그거… 읽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읽었고, 첫 문장에서 이미 끝났다고 느꼈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담담히 말했다.

> “그래서 물을게.

그 상간남하고 정말 끝낸 거야?”

> “…응. 끝냈어.

회사에 공식적으로 이관 요청도 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건 네 선택이야.

하지만 지금부터 선택하는 건 내 몫이야.”

---

며칠 뒤,

아내는 내게 보고하듯 말했다.

> “오늘 회식이 있어.

위치 공유해둘게.”

“회의는 몇 시에 끝나고,

누구누구 참석하는지도 문자로 보낼게.”

나는 그 모든 말을 듣고도

아무런 표정 없이 대답했다.

> “네가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거야.

지금은 네가 신뢰를 회복해야 할 입장이니까.”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내 감정을 주지 않는다.

감정적으로 다투지 않고,

애써 붙잡지도 않는다.

그녀는 초조해진다.

이전에는 내가 먼저 화를 내고

사과하면 되돌아오던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 나는 내 마음을

어디에도 헌납하지 않는다.

---

나는 내 삶을 찾기 시작했다.

헬스장 등록

미뤄뒀던 취미 다시 시작

새로운 독서 모임 가입

나를 위한 옷 구입

아내는 불안해하며 묻는다.

> “요즘엔 나보다 너한테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나는 짧게 대답했다.

> “맞아.

이제야 나한테 좀 돌아온 기분이야.”

며칠 전,

아내는 침대맡에 앉아 말했다.

> “…이제는 나 좀 믿어줄 수 있어?”

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 “믿음은 네가 요구하는 게 아니야.

네가 다시 쌓아야 하는 거지.”

> “그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 “한 번 더 네가 흔들린다면,

나는 미련 없이 끝낼 거야.

아이한테도 그렇게 말할 거고.”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눈빛에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살아냈다.

마음은 아직 무겁고,

과거는 아직 잊히지 않았지만,

이제 내가 나를 버리지는 않는다.

그녀는 나의 아내였고,

그 남자는 그저 지나간 타인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나라는 사람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나는 선택한다.

내 감정, 내 시간, 내 사람을

‘검증된 신뢰’에게만 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걸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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