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전에 딸아이 등교를 챙겼다.
김밥 싸달라고 해서 일찍 일어났다.
전날 밤, 칼질 연습을 했는데, 새벽에 그걸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런 아버지다.
학교 알림장도 내가 보고,
학원비 이체도 내가 하고,
병원 예약도 내가 하고.
내가 이 집의 엄마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정작 아내는 모른다.
내가 이렇게까지 아이를 챙기는 이유는 하나다.
그녀가 바쁘니까.
일도 많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다.
정말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런 아내가 나와 결혼해준 게 신기했다.
그래서 더 조심했다.
비교당하지 않으려고,
기죽지 않으려고,
애쓰고 또 애썼다.
그런데… 그게 무너진 건,
선명한 란제리 하나 때문이었다.
3주 전.
우연히 옷장을 정리하다가 낯선 속옷을 발견했다.
일본 영상에서나 봄직한,
선명한 빨강, 밑이 뚫린 란제리.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다.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마음 한켠에 파문이 생겼다.
그 후, 매일이 지옥 같았다.
출근길에도, 회의 중에도,
아이에게 밥을 먹이면서도
그 란제리가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결국, 나는 선택했다.
사람을 썼다.
내 손으로 그녀를 미행할 순 없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아이가 위험했고,
회사를 하루만 빠져도 눈치가 보이는 나였다.
며칠 뒤, 리포트가 도착했다.
“XX 무인텔, 오후 1시 30분 입장 – 오후 5시 30분 퇴장.
동행자: 30대 초반 남성. 긴 머리, 마른 체형.”
머리가 띵했다.
그리고 곧장 집에 와서 옷장을 열었다.
그날 아침까지 걸려 있던 그 속옷은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그걸 입고,
젊은 남자와 모텔에서
사랑을 나눈 것이다.
나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탁자도 뒤엎지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다.
오히려 웃겼다.
내가 평소에 차려주던 밥,
내가 개던 속옷,
내가 데려다준 출근길.
그 모든 일상 위에,
그녀는 다른 남자를 겹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딸이 내게 안겼다.
“아빠, 오늘은 나랑 꼭 같이 자야 돼.”
나는 알았다.
내가 지금 무너지면,
이 아이도 무너진다는 걸.
그래서, 나는 감정을 묻었다.
일단은, 모든 걸 계획대로 준비하기로 했다.
변호사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가능성’을 상담하러 간 것이다.
이혼을 할지, 가정을 유지할지,
그건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끌려다니진 말아야 한다.
변호사는 말했다.
“현재 양육 대부분을 맡고 계시니 유리한 상황입니다.
경제적 능력은 고려되지만, 감정적 대응은 피하세요.”
맞다.
내가 폭발하면
그녀는 적반하장으로 나올 것이다.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야.”
“당신이 사람 취급을 안 했잖아.”
“애만 챙기고 나한텐 관심도 없었잖아.”
나는 벌써 그녀가 할 말들을 다 예상했다.
그래서 준비하기로 했다.
이 집안에서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로.
나는 평소처럼 행동한다.
딸을 챙기고,
밥을 하고,
아내와 대화도 나눈다.
그녀는 눈치를 못 챈다.
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녀는 방심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휴대폰을 확인했고,
그녀의 외출 스케줄을 메모했다.
차 블랙박스를 백업했고,
계좌 사용 내역을 확보했다.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기록의 시간이다.
내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타이밍.
이혼을 할지,
그녀에게 기회를 줄지는
나중의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를 이렇게 만든 일에 대해서는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불쌍한 남편도,
무너진 가장도 아니다.
나는
아이의 보호자이자,
내 삶의 전략가다.
오늘도 아무 일 없던 척 행동했다.
그게 내 복수의 첫 번째 카드니까.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방심하는 그 순간,
나는 조용히
모든 걸 꺼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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