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이가 소풍을 갔다.
아침부터 도시락을 싸고, 물병에 이름 붙이고, 신발끈까지 묶어주면서 웃었다.
정말 많이 웃었다.
근데 웃고 나니까 더 아팠다.
그 애를 등원시키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녀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제는 당신이 결정해.”
정말, 이제 내가 정해야 할까.
이 결혼을 끝낼지,
한 번 더 믿어볼지,
아니면… 그냥 잠시 멀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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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가슴이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돈이 많지도,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하지만 성실했고, 집안일도 했고, 아이를 키우는 데 누구보다 헌신했다.
퇴근하고 와서 장난감 치우고, 밥 하고, 아이 책 읽어주고, 잠재우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그런 나를 보며 “고맙다”고 했었다.
근데 그 입술로
다른 남자와 “사랑해”를 속삭였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안의 무언가가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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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용서했었다.
사람이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도 부족했겠지,
내가 너무 무뎌졌겠지.
그러니까 그랬겠지.
정말… 그렇게 믿으려고 했었다.
근데 두 번째는,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속여봐도
‘실수’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그녀는 선택한 거다.
나 말고, 그를.
우리의 가정보다
자신의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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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미안하다고 했다.
무릎까지 꿇고 말했다.
근데 이상하지.
그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도, 실망도,
다 지나가고 난 뒤라
그냥… 무력했다.
“이제는 당신이 정해. 나를 떠날지, 한번 더 받아줄지.”
그녀는 책임을 내게 넘겼다.
나는 가해자에게 용서를 ‘줄지 말지’의 선택권을 주는 희한한 상황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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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아팠다.
그래서 아직도 아프다.
하지만 사랑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도,
지금은 너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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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거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방 안에서 아이와 함께 잠들었다.
문득, 이 집이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 결혼사진 속 환하게 웃던 그 시절이
지금 이 침묵 속에서 너무 이질적이었다.
그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 결혼을 했을까?
…그래도 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의 그녀는
분명 진심이었으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선택은 무엇일까.
끝내고 새로 시작할 것인가?
조건을 걸고, 다시 기회를 줄 것인가?
시간과 거리를 두고 진짜 내 마음을 확인해볼 것인가?
하나같이 쉬운 선택이 아니다.
무엇을 고르든,
아무도 ‘정답’이라 말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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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스럽더라도
그녀를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내 딸은
그녀가 세상 전부인 줄 알고 있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유치원 가는 아이를 보면
그녀를 떠나게 하는 게
아이에게도 상처가 되겠지 싶다.
그래서 참는다.
그래서 고민한다.
어른의 실수를, 아이가 짊어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내 마음은 무겁다.
하지만 동시에 단단해지고 있다.
이건, 이제
내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문제다.
그녀가 나를 다시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도
솔직히 조금은 있다.
내가 손 놓기 전에,
그녀가 먼저 나를 잡아주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기대일 뿐이다.
현실은,
내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
그래서 나는
결정하기로 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땐 말없이 떠나겠다.
지금은,
딸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한 번만 더’ 남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내 자리’를 지킬 것이다.
더는 무너진 채로 사랑하지 않겠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며
조금은 덜 흔들린다.
내가 약한 게 아니라,
내가 진심이었기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겠다.
오늘도 살아냈다.
그리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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