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갈림길 앞에서

한해동안 2025. 3. 26. 18:08

오늘은 아이가 소풍을 갔다.

아침부터 도시락을 싸고, 물병에 이름 붙이고, 신발끈까지 묶어주면서 웃었다.

정말 많이 웃었다.

근데 웃고 나니까 더 아팠다.

그 애를 등원시키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녀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제는 당신이 결정해.”

정말, 이제 내가 정해야 할까.

이 결혼을 끝낼지,

한 번 더 믿어볼지,

아니면… 그냥 잠시 멀어질지.

---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가슴이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돈이 많지도,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하지만 성실했고, 집안일도 했고, 아이를 키우는 데 누구보다 헌신했다.

퇴근하고 와서 장난감 치우고, 밥 하고, 아이 책 읽어주고, 잠재우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그런 나를 보며 “고맙다”고 했었다.

근데 그 입술로

다른 남자와 “사랑해”를 속삭였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안의 무언가가 부서졌다.

---

처음은 용서했었다.

사람이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도 부족했겠지,

내가 너무 무뎌졌겠지.

그러니까 그랬겠지.

정말… 그렇게 믿으려고 했었다.

근데 두 번째는,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속여봐도

‘실수’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그녀는 선택한 거다.

나 말고, 그를.

우리의 가정보다

자신의 감정을.

---

그녀는 미안하다고 했다.

무릎까지 꿇고 말했다.

근데 이상하지.

그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도, 실망도,

다 지나가고 난 뒤라

그냥… 무력했다.

“이제는 당신이 정해. 나를 떠날지, 한번 더 받아줄지.”

그녀는 책임을 내게 넘겼다.

나는 가해자에게 용서를 ‘줄지 말지’의 선택권을 주는 희한한 상황에 놓였다.

---

사랑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아팠다.

그래서 아직도 아프다.

하지만 사랑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도,

지금은 너무 잘 안다.

---

오늘 밤, 거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방 안에서 아이와 함께 잠들었다.

문득, 이 집이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 결혼사진 속 환하게 웃던 그 시절이

지금 이 침묵 속에서 너무 이질적이었다.

그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 결혼을 했을까?

…그래도 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의 그녀는

분명 진심이었으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선택은 무엇일까.

끝내고 새로 시작할 것인가?

조건을 걸고, 다시 기회를 줄 것인가?

시간과 거리를 두고 진짜 내 마음을 확인해볼 것인가?

하나같이 쉬운 선택이 아니다.

무엇을 고르든,

아무도 ‘정답’이라 말해주지 않는다.

---

만약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스럽더라도

그녀를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내 딸은

그녀가 세상 전부인 줄 알고 있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유치원 가는 아이를 보면

그녀를 떠나게 하는 게

아이에게도 상처가 되겠지 싶다.

그래서 참는다.

그래서 고민한다.

어른의 실수를, 아이가 짊어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내 마음은 무겁다.

하지만 동시에 단단해지고 있다.

이건, 이제

내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문제다.

그녀가 나를 다시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도

솔직히 조금은 있다.

내가 손 놓기 전에,

그녀가 먼저 나를 잡아주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기대일 뿐이다.

현실은,

내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

그래서 나는

결정하기로 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땐 말없이 떠나겠다.

지금은,

딸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한 번만 더’ 남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내 자리’를 지킬 것이다.

더는 무너진 채로 사랑하지 않겠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며

조금은 덜 흔들린다.

내가 약한 게 아니라,

내가 진심이었기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겠다.

오늘도 살아냈다.

그리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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